[돋을새김-서완석] 스포츠와 명품도시
입력 2011-09-07 17:46
대구가 명품 도시로 도약할 기회가 1300여년 전에 있었다. 통일신라 신문왕(재위 681∼692년)은 경주에서 60㎞ 떨어진 대구로 천도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경주 기득권층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쳐 천도 계획은 무산되고 만다. 그때 대구가 통일 신라의 새 수도가 됐다면 대구는 일찌감치 실크로드를 넘어 로마와 교류하는 국제도시가 되었으리라(신라고분에서 나온 유물 가운데는 로마계통의 유리잔이 있다).
대구가 한국 문화·예술의 중심지였던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한국전란 통에 서울에서 피난온 문화·예술인들이 대구를 중심으로 활약하던 시기였다. 산업화 과정에서 대구는 현재 한국산업을 이끄는 반도체, 자동차, 조선, 석유화학과는 비켜나 있었다. 민주화 과정에서 4·19혁명에 앞서 2·28 학생의거가 있었지만 군사정권의 주역들이 이 지역을 연고로 했다는 이유로 엉뚱한 오해를 사곤 했다. 대구는 3대도시란 쇠락한 명성만 뒤집어 쓴 채 그저 배타적이고 보수적인 그런 이지미의 도시로 치부됐다. 학창시절을 대구에서 보낸 필자가 외부의 시선으로 느끼는 대구는 그렇다.
이 같은 역사 속에서 최근 대구에서 열린 세계육상선수권대회가 도시발전의 한 획을 긋는 전기가 되지 않을까. 그렇지 못하다면 일부의 비판처럼 남의 잔치만 한 꼴에 지나지 않는다. 88서울올림픽은 냉전 종식에 기여했다는 세계사적 의미 외에도 지구촌의 주역으로 우뚝 선 우리 자신을 발견한 것이 가장 큰 수확이었다. 마찬가지로 이번 육상대회도 특히 대구시민들의 의식 변화에 크게 기여했다고 믿고 싶다.
이번 대회를 통해 얻은 가장 큰 수확은 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러낸 시민들의 자부심과 자신감일 것이다. ‘올림픽 준비의 절반이 육상’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세계육상대회는 다른 종목과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대회준비가 복잡하다. 그런 만큼 전문가뿐 아니라 자원봉사자, 서포터스 등 시민들의 호응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결국 대구 시민은 해냈다.
동원이 됐건, 자발적이건 관중석을 꽉꽉 채워 흥행에 성공한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학생들을 오전에 동원한 것은 교육차원에서 의미있는 일로 보고 싶다. 이를 두고 비판적 시각도 있는 모양이나 국제육상경기연맹 회장은 오히려 좋은 아이디어였다며 반색했다는 후문이다.
대회 기간 각종 문화행사에 연인원 100만명의 시민이 참여했다는 것도 인상적이다. 세바스찬 코 런던올림픽조직위원장은 행사에 적극 참여하는 시민 정신을 런던으로 가져가고 싶다고 말할 정도였다. 대구의 청결함은 싱가포르와 비교해 손색이 없다는 외신보도도 있었다. 이 같은 자부심은 그동안 대구시민을 짓눌러 왔던 부정적 이미지, 즉 배타적이고 보수적인 이미지에서 탈피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202개 참가국을 아우른 국제적 안목은 대구를 명품 도시로 탈바꿈시키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자부심이 대회를 치른 최대 성과라면 이를 계승해 도시발전으로 이어 가는 작업은 이제부터 할 일이다. 그 가운데 핵심은 육상문화가 아닐까. 달리기 문화는 이미 성인층을 중심으로 국민들의 생활 속에 뿌리내린 레포츠가 됐다. 문제는 엘리트 선수생활로 이어지는 학생들의 육상문화는 갈수록 쇠퇴한다는 데 있다.
이번 대회 옥에 티는 노메달에 그친 한국의 성적이었다. 아시아에서 세 번째 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치른 도시답게 대구가 한국육상의 요람이 되기를 자임해야겠다. 필자가 초등학교 다니던 1960∼70년대 대구에는 육상대회가 수시로 열렸고 종합운동장으로 응원 나간 기억이 생생하다. 모두가 육상선수가 될 필요는 없지만 육상선진국이 되는 그 기초, 즉 저변확대는 반드시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학생들에게 달리는 문화가 보편화돼야 한다. 때마침 대구시가 이번 대회에서 얻은 성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코자 ‘포스트 2011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있다고 하니 지켜볼 일이다.
서완석 국장기자 wssuh@kmib.c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