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김호경] 나는 재즈 1세대다

입력 2011-09-07 17:46


일본의 국민작가로 세계적 지명도를 갖고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는 재즈에 대한 언급이 빈번하게 나온다. 예컨대 가장 최근에 출간돼 한국에서도 100만부 이상 팔린 소설 ‘1Q84’는 맨 첫 장을 이런 문구로 시작한다.

‘여기는 구경거리의 세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다 꾸며낸 것/ 하지만 네가 나를 믿어준다면/ 모두 다 진짜가 될 거야.’

수수께끼 같은 이 문구는 실은 ‘그건 단지 종이달일 뿐이야(It’s Only A Paper Moon)’라는 유명한 재즈 스탠더드 곡의 가사 일부다. 재즈 종주국인 미국에서 1932년부터 유행한 이 고전적인 곡이 책 본문에도 여러 번 등장한다. 그래서 ‘종이달’은 전체 텍스트를 관통하는 키워드 역할을 한다. 이처럼 하루키의 장편소설 대부분에서 재즈가 일상적인 소재나 중요한 장치로 곳곳에 배치되기 때문에 재즈를 전혀 모르면 작품의 플롯이나 서정을 이해하는 데 불편을 느낄 정도다. 좀 더 살펴보면 이런 식이다.

“존 콜트레인의 소프라노 색소폰, ‘마이 페이버릿 싱스(My Favorite Things)’.…참을성 많은 후렴이 조금씩 현실의 장을 무너뜨리고 재편성해 간다.”(해변의 카프카) “‘스타 크로스드 러버스(Star Crossed Lovers)’를 들으면 나는 언제나 그 무렵의 나날과 거울에 비친 내 눈이 떠올랐다.”(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나는 창문을 닫고 카세트테이프로 스탄 게츠와 찰리 파커를 들으면서 ‘철새는 언제 자는가?’라는 항목을 번역하기 시작했다.”(1973년의 핀볼)

한국에서 인기 있는 또 하나의 일본 작가 무라카미 류의 소설을 포함해 일본의 문학작품에는 재즈 소재가 자주 등장한다. 이는 작가들이 꼭 재즈광이기 때문이 아니라 일본 사회에서 재즈가 그만큼 보편적으로 향유되기 때문이다. 독자들이 도통 모르는 음악을 작품에서 그렇게 남발할 수는 없다. 실제로 일본은 적국이었던 미국으로부터 재즈를 적극 받아들여 이미 1960년대부터 붐을 이뤘다. 클럽이 전국에 수천 군데가 되고 재즈만 24시간 방송하는 FM 프로그램이 등장한 것도 오래 전부터다. 그 결과 일본은 미국 다음으로 큰 시장을 형성하고 있으며, 특히 퓨전 재즈 분야는 세계 최고 수준으로 꼽힌다.

반면 한국에서는 1960년대 미 8군 쇼가 유행하던 시절 스윙 재즈가 반짝하고 인기를 끌었을 뿐, 이후 사회적으로 소외된 음악 장르의 처지를 거의 벗어나지 못했다. 지금은 환경이 다소 좋아졌다고 하지만 일본의 두터운 내수시장에 비할 바는 아니다. 재즈가 세계적인 주류 음악인데도 불구하고 국내 가수와 연주자 대다수는 여전히 ‘춥고 배고픈’ 신세다.

지난주 회사 동료들과 함께 서울 서교동에 위치한 재즈 클럽 ‘문 글로우(Moon Glow)’를 찾았다. 이곳에서는 평균 연령이 70대인 ‘대한민국 재즈 1세대’ 연주자들이 매주 목요일마다 정기 공연을 벌인다. 김준(보컬), 신관웅(피아노), 이동기(클라리넷), 최선배(트럼펫), 김수열(테너색소폰), 류복성(라틴퍼커션), 임헌수(드럼) 등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의 멋진 연주에 일행을 포함한 40여명의 관객은 시종 열광했다. 무슨 곡인지 구체적으로 몰라도 다들 흥에 겨워 어깨를 들썩였다. 하지만 다른 재즈 클럽들과 마찬가지로 문 글로우 역시 지독한 경영난을 겪고 있어 언제 무대가 사라질지 모른다.

재즈의 황무지에서 악전고투해온 이들 1세대는 열악한 환경에 처한 국내 연주자들을 상징한다. 이들이 좀 더 안정적인 시장에서 활동할 수 있는 날이 언제쯤 올까. 일본처럼 재즈의 저변이 확대되면 우리 대중문화도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hkkim@kmib.co.kr

김호경 특집기획부 차장 hk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