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김의구] 그라운드 제로

입력 2011-09-07 17:46

그라운드 제로는 원래 핵무기와 관련된 군사용어였다. 1946년 미국 공군이 일본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파괴력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폭발이 일어난 상공을 ‘에어 제로’, 그곳에서 가장 가까운 지표를 그라운드 제로라고 표현했다.

‘제로’는 2차대전 당시 미국의 핵무기 개발 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원폭 실험지에 붙인 코드명이다. 1945년 7월 16일 이뤄진 인류 최초의 핵실험인 ‘트리니티’에서 가제트라는 핵폭탄이 떨어진 제로 지점은 뉴멕시코주 소코로카운티에서 남동쪽으로 56㎞ 떨어진 조르나다 델 무에르토 사막이었다. 같은 해 8월 6일 리틀보이라는 우라늄 핵폭탄은 히로시마의 시마병원에 떨어졌고, 사흘 후 팻맨이라는 플루토늄 핵폭탄이 떨어진 나가사키의 그라운드 제로에는 기념공원이 세워졌다. 미 국방부 청사 중앙광장에는 그라운드 제로 카페라는 스낵바가 있는데 이 역시 냉전시대 미국의 적성국이 핵미사일 공격을 가할 경우 펜타곤이 최우선 표적이 될 것이라는 이유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2001년 9·11테러 사건 이후 뉴욕의 110층짜리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진 6만5000㎡의 폐허는 그라운드 제로의 대명사가 됐다. 핵 공격은 아니었지만 그에 맞먹는 참사라는 의미에서 미 언론들이 그라운드 제로를 원용하면서 이 단어는 대형 폭발이나 지진 등의 진원지라는 뜻으로 확장됐다. 곧 9·11 10주년이지만 뉴욕의 그라운드 제로는 아직 복원이 이뤄지지 못했다. 무역센터 부속건물이던 제7동은 2006년 다시 문을 열었으나 올해까지 완공하려던 제1 센터타워를 비롯한 건물들은 예산 부족 등으로 공사가 미뤄졌다. 다만 3000명 가까운 희생자의 이름이 새겨진 풀을 갖춘 추모관과 박물관은 10주년 기념식 때 개장될 예정이다.

마이클 블룸버그 뉴욕시장은 최근 이곳을 더 이상 그라운드 제로라고 부르지 말자고 제안했다. 테러의 참상은 잊지 않겠지만 세계무역센터란 이름을 되찾아 새롭게 시작하자는 의미다. 하지만 9·11 당시 뉴욕시장으로 인명 구조 작업을 지휘했던 공화당의 루돌프 줄리아니는 “진주만 공격은 역사의 일부가 됐지만, 9·11은 아직 역사가 아니라 현실”이라고 말했다. 테러의 주범 오사마 빈 라덴이 지난 5월 미 해군 특수부대 네이비실에 사살됐고 이라크에서 미군이 철수했지만, 테러리스트들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이다. 동시대를 살며 겪은 전대미문의 참사에 대한 인식에도 이렇게 큰 차이가 있다.

김의구 논설위원 eg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