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한 찬송가 악보 정사가 양재식옹 “컴퓨터로 찍어낸 요즘 악보 인간미라곤 없죠”

입력 2011-09-07 19:06


까까머리 중고등학생 때 그의 꿈은 성악가였다. 음악대학 진학을 희망했다. 음대를 나온 누나의 반대에 부닥쳤다. 다녀보니 배곯기 십상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음대를 가면 등록금을 대줄 수 없다는 폭탄 발언까지 했다. 결국 당시 인기 학과인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그러나 그는 반평생을 악보 만드는 정사가(淨寫家)로 살아왔다. 현재 생존해 있는 유일한 찬송가 악보 정사가 양재식(82·초동교회) 장로 이야기다. 최근 경기도 용인시 자택에서 양 장로를 만났다. 그는 인터뷰하는 내내 아직도 식지 않은 찬송가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기자를 맞은 양 장로는 작은 나무 상자가 나란히 놓인 거실로 안내했다.

“직접 봐야 이게 뭐구나 알 수 있어요. 이것들이 악보의 기호들이에요.”

그가 가리킨 작은 나무상자에는 나무를 깎아 도장처럼 새기거나 아연판에 새긴 각종 악보 기호와 음표들이 가득했다. 살짝 들어보니 만만치 않은 무게감이 느껴졌다. “이게 크기는 작아도 아연이라 무거워요. 납으로 만든 것들도 있었는데 이사 다니다 보니 무거워서 가지고 다닐 수 없어 다 잃어버렸어요.”

정사(淨寫)

정사 과정을 설명하는 양 장로는 감회에 젖어 상기되는 듯했다. 기호와 음표들을 그린 원도를 공장에 맡기면 전문가가 기계를 이용, 아연판에 새겨 주자를 만든다. 지금은 컴퓨터를 이용해 자유자재로 늘렸다 줄였다 하지만 1960∼70년대에는 크기 조절이 안돼 일일이 크기별로 만들어야 했다. 큰 음표들은 양 장로가 나무를 깎아 만들었지만 작은 음표들은 아연이나 납에 새겼다. 수작업이었지만 컴퓨터 같은 정교함과 치밀함이 놀라웠다.

양 장로는 악보를 정사하는 방법을 재현해 보였다. 하얀 종이에 T자와 삼각자를 이용, 오구로 오선을 긋기 시작했다. 볼록하게 도장처럼 새긴 나무 음표에 잉크를 묻혀 악보에 하나하나 찍어 그렸다.

악보는 6명이 한 조를 이뤄 그렸다고 한다. 양 장로는 오선을 칠 수 있는 전문적인 작업을 미리 해놓았다. 한 명은 간격을 맞추기 위해 구멍 뚫린 자를 대고 오선을 그렸다. 다른 한 명은 그 위에 높은음자리표를 붙였다. 또 다른 한 명은 음표 머리만 찍었다. 음표 기둥을 세우고 마지막 한 명은 음표 꼬리를 붙였다.

하나의 찬송가 악보를 완성하는 데 평균 3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찬송가 550여장을 그리는 데 걸린 시간을 대략 따져보니 1700여시간에 달했다.

“틀릴 경우 수정하기가 어려워 찬송가는 혼자 작업했어요. 한 권을 정사하는 데 꼬박 반년 정도 걸렸어요.”

우리나라 찬송가 악보 정사가로는 양 장로 외에 두 명이 더 활동했으나 지금은 별세해 양 장로가 유일하다. 이들이 혼을 담아 만든 찬송가가 70, 80년대 한국 기독교 부흥의 한 축을 담당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악보 정사가가 되다

모태신앙이었던 양 장로는 어릴 적 어머니 등에 업혀 교회에 다녔다. 찬양 소리를 듣고 자란 그는 음악에 남다른 소질을 가지고 있었다. 사범학교를 나와 강릉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했다.

스무 살에 선배의 권유로 군악대에 들어갔다. 입대 후 2, 3일 지나 6·25가 났다. 고향인 강릉에서 제천, 대구, 안동, 영천. 서울, 평양, 함북 희천까지 한반도를 종단했다. 전쟁 통에도 사단에서 주최한 음악 콩쿠르에서 성악으로 우승했다. 그 인연으로 부산 군악학교에 입학했다.

전쟁 후 서울에 올라온 양 장로는 초동교회에 출석했다. 대학 진학도 했다. 그러나 졸업 후 정사를 배우려고 정사가를 찾아갔다.

“6·25 이전의 찬송가는 일본에서 들여온 찬송가에 한글을 덧붙여 썼어요. 1940년대 이후 악보를 그리는 사람이 생겼어요.”

출중한 음악 실력과 손재주가 있었던 그는 1년간 심부름을 하며 모든 것을 배우고 나왔다. 초등학교 음악 교과서의 악보를 정사하기 시작했다. 3, 4년 주기로 교과서가 개편될 때마다 중고등학교의 음악책도 만들었다. 66년까지 했다.

그러던 70년 어느 날 출판사 사장인 초동교회 김영진 장로가 찬송가 정사를 권했다.

“그러지 않아도 크리스천으로서 찬송가를 직접 그려 남기는 게 소원이었어요. 찬송가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바치는 마음으로 했어요. 정사를 하면서도 늘 잊지 않은 건 크리스천다운 삶을 살아야겠다는 것이었어요.”

찬송가는 다른 작업보다 손이 많이 가고 힘들었다. 교정도 여러 번 반복했다. 그러나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게 폐가 되지 말아야겠다는 각오로 임했다. 일생에 한 번뿐인 그의 찬송가는 그렇게 탄생했다. 이후 96년 3월 성서교재간행사에서 발행한 ‘큰 글자 해설 찬송가’를 마지막으로 그가 정사한 찬송가는 더 이상 출간되지 않았다. 컴퓨터가 정사를 대신하면서 정사가란 직업도 영원히 사라졌다.

한때 그의 정사 실력은 해외에까지 정평이 났다. 미국 독일 영국 이란 등에서 악보 정사 의뢰가 들어왔다. 미국 출판협회에서는 80년부터 85년까지 6년간 그의 악보 정사의 우수성을 인정, 상을 주기도 했다.

아쉬움

양 장로는 컴퓨터를 이용, 대량으로 찍어내는 현재의 찬송가 악보에서는 아름다움이 사라졌다며 아쉬워했다. 인간미와 장인의 살아 숨쉬는 손길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또 하나 아쉬운 것은 하나하나 직접 파서 만든 음악 기호와 음표들을 새긴 도구와 악보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80년 중반 이후 더 이상 의뢰가 들어오지 않자 무거운 납으로 된 도구들을 버렸다. 의뢰만 하고 찾아가지 않아 묵혀둔 악보들도 함께 버려졌다. 그러나 몇 년 전 서울에서 열렸던 해외출판전시회에서 악보 정사 자료가 전시된 것을 보고 무척 후회스러웠다.

“이것도 하나의 역사인데 보관하지 못한 것이 정말 후회되지요. 남은 것이 얼마 되지는 않지만 기회가 된다면 정사 도구들을 전시해 여러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누구보다 찬송가에 대한 애정이 넘치지만 양 장로의 교회음악에 대한 사고는 편협하지 않았다.

“예수 믿는데 어떤 틀을 논할 필요는 없어요. 유행가가 필요하면 해야지요. 문제는 예수를 믿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친구 따라,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각별하고 깊은 신념을 갖고 있어야 해요.”

그는 시대가 빠르게 변화하므로 교회도 따라 변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젊은이들을 오게 하려면 교회가 북도 치고 노래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양 장로는 결혼 후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하는 것이 있다. 매일 30분씩 빠르게 걷기다. 찬송가를 정사하면서도 즐겨 부르던 노래는 아직 그의 삶의 활력소가 되고 있다.

“주님께서 능력 주신다면 저 산꼭대기도 올라갈 수 있고, 능력 주신다면 이 험한 바다도 건너갈 수 있습니다.”

가사와 멜로디가 좋아 자주 부른다는 ‘유 레이즈 미 업(You raise me up)’을 들려주며 하얀 종이에 오선까지 그어가며 해석을 곁들였다. 양 장로의 노래를 듣는 내내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슴 속 깊은 울림이 전해져 왔다.

용인=글 최영경 기자·사진 곽경근 선임기자 ykcho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