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이 있는 교회-강원 홍천 동면교회] 십자가 탑 아래 가을이 익어 가다
입력 2011-09-07 19:35
교회는 생명을 살리는 곳이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생명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면서 공생과 상생을 이루도록 해야 한다. 강원도 홍천군 동면의 동면교회는 바로 그 일을 하고 있다. 그 중심에 박순웅(49) 목사가 있다.
9월에 들어섰음에도 늦더위가 기승을 부린 날 교회를 찾았다. 교회는 따가운 햇살 속에서 녹음을 방패삼아 서 있었다. 마당에 늘어선 몇 그루 은행나무와 교회당 좌우로 펼쳐진 밭들이 전형적인 농촌교회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마당으로 들어서자 그늘에 누워 있던 개 두 마리가 얼른 일어나 방문객을 반겼다. “목사님 계시냐”는 방문객의 실없는 질문에 두 놈은 꼬리를 세차게 흔들기만 했다. 교회당 문을 밀쳐보았다. 어디선가 피아노 선율이 들렸다. 강단 구석 피아노 앞에 긴 머리의 소녀가 앉아 있었다. 마치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인기척이 날까봐 조심스레 밖으로 나오니 정혜례나(48) 사모가 인사를 했다. “목사님은 밭에 일 나가셨는데요.” 정 사모를 따라 밭으로 가 박 목사를 만났다. 영락없는 농부였다. 밀짚모자를 눌러쓴 얼굴은 많이 그을려 있었다. 일을 방해한 것 같아 미안해하던 차에 환하게 웃어줘 감사했다.
교회로 돌아와 찬찬히 둘러봤다. 여느 교회와 같은데 뭔가가 달랐다. 선입견인가 하던 차, 십자가 탑에서 이상한 게 눈에 띄었다. 까치집이었다. 하나가 아닌 두 개였다. “쟤들도 살려고 하는데 살려야죠.” 박 목사의 말을 얼핏 이해할 듯하면서도 아리송했다.
목사가 농부로
동면교회는 1953년 설립됐다. 외국 선교사와 홍천읍교회 교인들에 의해 인근에 세워졌다가 90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왔다. 10년 넘게 봉직한 목회자는 한 명뿐이고, 나머지는 대개 2∼3년 머무르다 떠났다. 박 목사가 94년 1월에 부임했으니 이 교회 최장수 담임목회자가 되는 셈이다.
박 목사는 부임 당시 교인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했다. 그들에게 박 목사는 곧 떠날 사람이었다. ‘잘 난’ 목사가 노인 30여명의 시골교회에 처박혀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그 자신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3녀1남의 자녀를 양육하고 목회자로서 꿈을 펼치기엔 부적합한 곳이었다. 1년을 그럭저럭 지낸 뒤 박 목사는 교인들 앞에서 의외의 선언을 했다. 직접 농사를 짓겠다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한 교인으로부터 하천부지 밭 1500여평을 임차했다. 보란 듯 옥수수와 감자를 심어 400여만원의 수확을 올렸다. 그 돈으로 교회당을 수리하고 어려운 주민을 도왔다.
하지만 교인들의 반응은 여전히 냉담했다. ‘언제까지 하나 보자’는 식이었다. 그래도 묵묵히 목회와 농사일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일에도 익숙해지고 작물도 다양화해갔다. 그렇게 7년 정도 지났을 즈음 교인들의 태도가 바뀌었다. ‘우리 편’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서로 간에 동질감과 신뢰가 생기고 교회가 안정돼 갔다. 교인도 조금씩 늘었다.
주민들 속으로
동면교회는 교인들만의 교회가 아니다. 주민들의 교회다. 교회는 그저 마을의 한 부분일 뿐이다. 마을에 무슨 일이 생기면 교회도 적극 참여한다. 때로는 교회가 앞장서기도 한다. 주위 어려운 이들에게 쓰는 재정이 적지 않다. 마을 사람들도 교회와 교인들을 남이라 여기지 않는다. 가끔 교회 마당에서 바자회나 장터가 열리면 동네잔치가 된다.
동면교회 교인은 50여명. 하지만 이는 숫자일 뿐이다. 박 목사에게는 주민들, 나아가 세상 사람들이 다 교인이다. 그래서 박 목사에게는 인근에 많은 친구들이 있다. 그중에는 농사를 비롯해 목공·야생화·염색·한지 등 각 분야 전문가들도 있다. 박 목사는 그들을 ‘교회 밖 교인’으로 부른다.
이웃 그리고 세계를 향해
동면교회는 누가 봐도 지극히 평범한 이 땅의 농촌교회다. 하지만 그 안에는 비범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무엇보다 감리교단의 생활협동조합 운동의 거점 역할을 하고 있다.
오랫동안 유기농·친환경농법으로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농촌-도시 간 직거래 운동을 벌여온 박 목사가 2009년 감리교 농도생협(ndcoop.net) 이사장을 맡았다. 30여 농촌교회 목회자와 연대해 생산한 농산물을 전국 15개 생협 지부 교회 등으로 공급하고 있다. 교회당 출입문 안쪽에 붙어 있는 ‘녹색교회’ 동판이 이를 어느 정도 대변했다. 지난 6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생명윤리위원회와 기독교환경운동연대로부터 받았다.
또 있다. 이건 대단한 일이다. 교회가 외부를 지향한다고는 하지만 작은 농촌교회가 세계를 바라보고 있을 줄이야. 지난해의 일이다. 박 목사가 교회 어린이 예배에서 털모자 하나면 추위에 떠는 아프리카 어린이들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한 교인이 털실을 사 달라고 10만원을 내놨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70여만원이 모였다. 노인들이 교회에 모여 털모자와 무릎덮개 200여개를 짜서 어린이 구호 단체에 보냈다. 교인들은 이 일로 큰 자부심을 갖게 됐다. 그 외에 교회는 미국 위스콘신주의 이동수 목사와 연계해 97년부터 양국 청소년 교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기도 하다.
농촌교회 목회 사명을 지고
박 목사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는 농부 체질인가’ 하는 의문을 내내 떨칠 수 없었다. 그는 “농촌은 생명의 근원이기에 누군가는 지키고 가꾸어야 한다”면서 “농사일을 하면서 한 번도 지겹거나 힘들다고 느껴본 적 없다”고 말했다. 답은 사명감이었다. 자신의 일에 대해 “단순히 먹거리를 만드는 것 이전에 예수의 살을 먹고 피를 나누는 운동”이라고까지 했다.
그리고 직접 펜으로 쓴 8쪽짜리 주보에서 확증을 얻었다. 표지 상단에 큰 글씨로 ‘생명, 영성, 공동체’를 새긴 주보는 박 목사의 생각과 자세를 잘 대변해 주었다. ‘오늘의 말씀 요약’ ‘함께 생각하는 글’ ‘생활 나눔’ ‘농사 이야기’ ‘영성생활’ ‘마을과 교회 이야기’ ‘교회소식’ 등으로 된 주보는 그 자체로 은혜로웠다.
사실 햇볕에 많이 타긴 했지만 안경 너머 그의 눈은 선비 분위기를 풍겼다. 일 때문에 투박해지긴 했지만 그의 손도 오히려 펜대 잡기에 적합한 것 같았다. 목회자(박상수 목사)의 아들이면서 감신대와 연세대 신대원을 나온 그가 전도유망한 엘리트였다는 건 많은 동료 목회자들의 증언이기도 하다.
결국 생명 사랑을 위해
박 목사는 나이 많은 교인들을 ‘어르신’이라고 불렀다. 그는 그들을 ‘지혜의 박물관’이라고 했다. 언젠가 박 목사가 한 어르신에게 “달이 참 밝네요” 했더니, 어르신이 “목사님, 달이 밝은 게 아니라 하늘이 맑은 거죠” 하더란다. 박 목사는 그들에게서 순간순간 예수의 모습을 발견한다고 했다.
동면교회는 4년 전부터 십자가 불을 밝히지 않는다. 앞에서 말한 까치집 때문이다. 처음엔 까치가 전선을 부리로 쪼아 불을 끄기에 두 번이나 까치집을 헐었다. 그러다 교인들끼리 협의해 아예 불을 끄기로 했다. 생명을 존중하는 박 목사와 교인들의 마음씀이었다.
어쨌든 동면교회는 풍성한 사연들과 함께 많은 생각할 거리를 갖고 있었다. 지난달 28일 나온 주보의 ‘함께 생각하는 글’에 실린 글 일부만 해도 그렇다. “우리가 믿고 있는 그분이 그랬고, 그분이 보낸 아들이 그러했고, 그 아들을 믿고 따랐던 신앙의 선배들이 그랬다. 자, 이제 우리 앞에도 선택이 놓여 있다. ‘아무도’와 ‘모두가’ 사이의 선택….”
경춘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서울에서 동면교회로 가는 길이 한결 수월해졌다. 경춘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춘천분기점에서 중앙고속도로로 바꿔 타고 홍천IC로 나간다. 이어 홍천읍 방면으로 가다 연봉교차로에서 인제 방향으로 우회전해 3㎞쯤 가다 오른쪽 444번 지방도(공작로)로 가면 동면 소재지가 나오는데 그 초입에 교회가 있다. 홍천군 동면 속초1리 796의4번지(033-436-6043). 인근 서면에는 한서교회와 남궁억 선생 기념관이 있다. 홍천강과 공작산생태공원, 수타사계곡 등이 지역의 볼거리다.
홍천=글 정수익 선임기자·사진 곽경근 선임기자 sag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