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詩 순례] 내 눈을 감겨 주십시오

입력 2011-09-07 19:30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6)

내 눈을 감겨 주십시오

나는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내 귀를 막아 주십시오

나는 당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발이 없을지라도

나는 당신 곁에 갈 수 있습니다.

또한 입이 없어도

나는 당신에게 애원할 수 있습니다.

내 팔을 꺾어 주십시오

나는 당신을 마음으로 더듬어 품을 수 있습니다.

내 심장을 멈추어 주십시오

나의 뇌가 맥박칠 것입니다.

만일 나의 뇌에 불이라도 사른다면

나는 나의 피로써 당신을 운반할 것입니다.

내 눈을 감겨 주십시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유성음으로 이루어진 그의 이름만으로도 그리움의 정서를 일으킨다. 이 시는 릴케의 연인이었던 루 살로메에게 헌정한 기도시다. 볼 수 없어도 볼 수 있고, 들을 수 없어도 들을 수 있고, 걸을 수 없어도 갈 수 있다고 말하는 시인의 뜨거운 심정이 전해진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도 이처럼 간절한가. 우리는 더 이상 ‘잃어버린 자’가 아니라 주님께 ‘발견된 자’이다. 우리의 인생이 그분의 손안에 있음을 알 때 진정한 평안을 얻을 수 있다.

릴케는 자신의 시 창작이 근본적으로 종교적인 치열성을 담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의 시는 멀리 있는 존재인 신을 향한 끝없는 날갯짓임을 대변한다. 그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왜 지금 여기 있는가’ ‘나는 어디서 끝나는가’란 질문들을 끊임없이 던진다. 인간 존재의 의미와 현실속의 고통을 성찰하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모색한다.

이지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