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선교 100주년] (1) 첫 사역지 중국 산둥성 옌타이를 가다
입력 2011-09-07 20:51
100년전 한인 선교사, 대륙 복음화의 관문을 열다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 한글성경을 갖고 있던 한국교회.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과 열정은 민족복음화 운동으로 승화됐고 1912년 마침내 해외 선교사 파송 결의라는 결실로 이어졌다. 자신의 안전과 평안을 기꺼이 버리고 성령의 인도에 따라 척박한 땅, 중국 산둥(山東)성을 향해 떠난 100년 전 선교사들의 선교 루트는 한국기독교의 자랑스러운 유산으로 자리잡고 있다. 본보 취재팀은 1차로 지난 달 31일부터 3일까지 옌타이(煙臺) 웨이하이(威海) 원덩(文登) 라이양(萊陽) 지모(卽墨) 칭다오(靑島) 에 이르는 1000㎞를 차로 이동하면서 초기 선교사들의 발자취를 따라갔다. 이번 취재는 백석대학교(하원 총장)와 사랑의교회(오정현 목사) 등과 공동 기획하고 산둥성 선교전문가 김교철(인천기독교역사연구소장) 목사가 집필진에 합류, 함께 진행해나갈 계획이다.
지난 1일 오전 10시. 비가 오락가락 내리고 있는 산둥성 옌타이를 찾았다. 한국교회의 해외선교 100년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기 위해서였다. 한국장로교회(당시 조선예수교장로회)는 1912년 총회를 설립한 기념으로 해외 선교사 파송을 결의했다. 이듬해 5월 첫 선교사로 파송된 박태로(재령읍교회) 목사 일행이 현지 조사차 옌타이항에 도착한 이래 1937년 마지막 산둥성 한인 선교사인 방지일 목사에 이르기까지 옌타이는 반드시 거쳐 가야 했던 길목이었다.
취재팀은 옌타이산(山)의 높이 50m 등대 위에 올랐다. 옌타이항과 함께 저 멀리 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 섬은 과거 서양 선교사들의 휴양지가 있었던 즈푸도(芝?島)다.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라고 시작되는 언더우드 선교사의 기도문이 떠올랐다. 당시 선교사들에게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설렘이나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더 컸었을 것만 같았다. 순간 가슴이 벅차올랐다. 수많은 내가 모여 큰 강을 이루듯 물설고 낯선 이국땅에서 세월을 바친 이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한국교회는 든든히 세워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초기 선교사들의 희생과 땀, 눈물은 한국교회의 토대이자 자양분이었다.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선교지향적이었다
“(1907년) 로회(노회)를 시작할 때에 졔쥬(제주도)에 선교사를 보냄으로 신령한 교회를 세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으로 우리에 깃븜(기쁨)이 충만한 바이온즉 지금 총회를 시작할 때에도 외국 전도를 시작하되 지나(支那·중국) 등지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를 청원하오며.”
1912년 9월 1일 오전 10시30분, 평안남도 평양 경창문안 여성경학원에서 시작된 한국장로교회 제1회 총회의 첫 번째 안건은 황해노회가 내놓은 선교사 파송 청원이었다. 당시가 일제 강점기라는 점에서 우리 민족은 고난 속에서도 선교를 최고 가치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한국교회는 1902년 12월 22일 미국 하와이에 홍승하 전도사를 파송했다. 그 뒤 1907년 장로교회 독노회를 설립하고 탐라(제주도), 일본 도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등지에 동포 및 유학생 선교를 위해 목회자들을 지속적으로 파송했다. 1884년 서양 선교사를 통해 복음을 전달받은 지 20년도 채 지나지 않을 때였다. 한국 크리스천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자민족 선교에 나선 지 5년여 만에 타민족 선교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장로교 총회는 선교사 파송과 함께 1년 중 한 주일을 특별히 정해 각 교회에서 기도와 헌금을 할 것도 결의했다. 지금의 선교주일 헌신예배가 100년 전부터 시작된 것이다. 당시 교회가 컸기 때문에 눈을 외부로 돌릴 것이 아니었다. 더욱이 재정적으로 풍족해서도 아니었다. 어린이들은 자신의 저금통을 깨고 선교비를 내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초기 선교사 중에는 총회 부총회장, 서기 등 교단 정치 거물도 적잖게 포함돼 있었다. 이들은 선교사가 되는 걸 거부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겼다.
이와 관련해 곽안련(郭安連·Charles Allen Clark) 선교사는 한국교회의 중국 선교사 선발 과정을 이렇게 묘사했다. “교회의 모든 목회자가 자발적인 해외 근무 직원이 된다는 것은 한국의 흥미로운 현상이다. 이러한 외지의 선교사역을 위해 사람을 선정할 때는 각 경우마다 담당 위원회가 선교지에 있는 선택 가능한 사역자들을 조사하여 그 선교과업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선정하기만 하면 되었다. 이때 선택된 사람은 어느 누구도 선교사로 가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선교사들은 현지어를 배우는 걸 당연시했다. 현지인을 통한 통역설교를 상상하지 못했다. 어떻게 하든지 현지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런 뒤 현지인에게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개척했고 미래 교회 지도자를 양성해나갔다.
한편 황해노회는 선교사 파송 청원서를 내는 데 그치지 않고 인물 선정을 책임졌다. 아울러 총회가 선교사 파송을 받아들이면 선교사 재정까지 담당하겠다고 했다. 당시 황해노회원으로 총회에 참석한 이는 한위렴(韓韋廉·William Blair Hunt) 사우업(史佑業·Charles Edwin Sharp) 공위량(孔偉亮·William Charles Kerr) 선교사와 우종서 김익두 최병은 박태로 이원민 목사, 장로 18명 등이었다. 한위렴 선교사는 이에 앞서 1912년 6월 30일 제2회 황해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당시 대형교회인 성도 1000여명의 재령읍교회 위임목사로 시무 중이던 박태로를 눈여겨봤다. 박 목사는 선교사 중심으로 운영되던 한국교회에서 첫 번째 위임목사가 된 한국인이었다. 물론 선교사의 영향력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박 목사가 재령읍교회 위임목사였지만 한위렴 선교사와 동사(同事)목회를 해야 했다.
한국교회의 해외 첫 선교사는 박태로 목사
총회 전도국은 창립 총회의 헌의위원이자 전도국 위원인 한위렴 선교사와 협의하고 그에게 적합한 선교지를 물색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그는 중국을 방문, 선교가 가능한 지역을 타진했다. 이를 위해 중국교회 지도자들뿐 아니라 중국 주재 미국 선교사들과 심도 있게 논의했다.
1912년 12월 5일 소래(松川)교회에서 열린 제3회 황해노회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노회 서기였던 박태로 목사에게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총회 해외선교의 중책을 맡아달라는 제안이었다. 즉 중국에 선교사로 나갈 수 없느냐는 것이었다. 박 목사는 재령읍교회 위임목사가 된 지 6개월도 안 된 상태였다. 쉽지 않은 결정일 수 있건만 박 목사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재령읍교회 성도들은 박 목사를 떠나보내야 하는 게 너무나도 섭섭해 한동안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고 한다. 박 목사를 위한 작별 만찬회는 한위렴 선교사의 사회, 김창일 장로의 기도, 사도행전 20장 봉독, 정찬유 장로의 축사, 박태로 목사의 이별사 등으로 진행됐다.
대형교회 목사이자 영향력 있는 노회 임원인 박 목사는 총회 명령에 절대 순종했다. 과연 지금 한국교회는 ‘최고의 에이스’를 선교사로 보내고 있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또 목회자들이 박 목사와 똑같은 제안을 받는다면 그처럼 행동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아무튼 박 목사는 다음해 5월 고향을 떠나 신의주로 이동한 뒤 윤선(輪船)을 타고 황해를 건너 옌타이에 도착했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평남 안주교회 김찬성 목사와 함께 산둥장로회와 선교지를 정하는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서였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여 지금 중화민국으로 보내신 선교사 박태로 목사를 보호하시고 옛날 바울의 앞에 열림같이 복음 전할 문을 널리 열어줍소서. 아멘.”
1913년 기일(奇一·James Scarth Gale) 선교사가 편집, 발행한 예수교회보는 이런 기도문과 함께 ‘중화민국으로 보내신 선교사 박태로 목사’라고 기록했다. 박태로 김찬성 목사는 중화민국 산둥성 내 몇 고을을 순례했다. 이들은 옌타이 남서부에 위치한 라이양(萊陽)에 선교부를 설치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조언을 받았다.
옌타이=함태경 기자 김교철 목사, 사진=서영희 기자 zhuanji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