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종석 (4) ‘불어’ 까막눈인 나를 프랑스로 이끄신 힘은?

입력 2011-09-07 17:49


의과대학 졸업 후 인턴·레지던트 과정, 거기다 군대 제대까지 내 인생의 큼지막한 일들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두려움과 회의, 고민이 많았지만 그때마다 의사로서의 꿈은 더욱 선명해져 갔다. 제대 후엔 국립의료원 내과에서 근무하게 됐다. 나이를 꽤 먹은 편이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에 결코 쉽지 않은 상황.

하지만 프랑스 유학의 꿈은 사그라질 줄 몰랐다. 문제는 프랑스어였다. 당시 ‘피앙세’의 뜻도 모를 만큼 내 프랑스어 실력은 형편없었다. 프랑스어도 할 줄 모르면서 프랑스 유학을 고집하다니, 내가 봐도 걱정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마치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아이처럼 프랑스어 기초부터 배워야 했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충무로에 가면 ‘알리앙스 프랑스’라는 프랑스어 전문학원이 있었다. 거기서 프랑스어 공부를 시작했다. 프랑스어는 보기엔 영어와 비슷하지만 발음은 완전히 다르다. 프랑스어는 문법이 그렇게 까다로울 수가 없었다. 문장을 보면 남자가 한 말인지 여자가 한 말인지 확연히 구별되고, 시제가 엄격했다. 외교문서를 작성할 때 프랑스어만큼 훌륭한 언어도 드물다고 생각했다.

‘알리앙스 프랑스’에서 약 6개월간 프랑스어 연수를 하고 나니 서툴지만 어느 정도 프랑스어 회화는 할 수 있었다. 중·고등학교 교과서도 읽을 정도였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전철이 없었다. 아마 1호선 전철이 착공 중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국립의료원 내과의사 시절이던 1976년 겨울, 난 프랑스 장학금을 받고 유학길에 올랐다. 날씨는 무척 쌀쌀하고 을씨년스러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시대적 상황 때문이었으리라. 그때만 해도 프랑스 직행 노선이 없었다. 김포공항에서 서북항공기(North West)편으로 일본 하네다 공항까지 가서 거기서 에어프랑스로 샤를드골 공항까지 가야 했다. 비행시간이 무려 23시간이 걸렸다.

공항에서 파리 시내까지 간 다음 거기서 다시 리용까지 가는 TGB 기차를 갈아탔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프랑스의 초원은 지상천국이 따로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겨울인데도 드넓은 초원에 새파란 잔디가 깔려 있고, 소들이 듬성듬성 그 잔디를 뜯고 있었다.

5∼6시간 달려 도착한 뒤 다시 봉고차를 타고 내가 도착한 곳은 비시라고 하는 인구 2만∼3만명의 자그마한 도시 하숙집이었다. 집은 혼자 살기에 알맞은 27평 정도의 2층 방이었다. 우리나라에는 없던 비데가 화장실에 비치되어 있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는 커피와 우유를 섞은 카페오레, 치즈조각(카멘베), 긴 막대 빵이었다. 처음 대하는 식단이었지만 먹음직했다.

비시는 아주 조용한 온천 휴양 도시였다. 나폴레옹이 자주 찾았다는 역사적인 고증도 있고 해서 꽤 세련미가 넘치는 분위기였다. 내가 이곳에 온 것은 프랑스어를 더 배우기 위해서였다. 내가 다니는 프랑스어학원에는 아시아는 물론 아프리카, 남미 등 세계 각지에서 온 학생들로 넘쳐났다. 대부분 그 나라의 상류층 자녀들이라고 했다.

약 6개월간 그곳 프랑스어학원을 다녔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프랑스 회화는 프랑스인들과 기초적인 대화를 나눌 만큼 실력을 쌓을 수 있었다. TV 방송을 봐도 꽤 이해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 다음 파리 제6대학인 피티에 살페트리에 의대 부속병원 내분비과 모르스 젠너 교수의 연구교수로 공부하게 되었다. 젠너 교수는 당시 내분비 분야에서는 세계적원 권위자였다.

정리=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