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의사 출신 하나상담센터 유혜란 목사 “생명 건 탈북보다 두려운 건 남한사회의 편견”

입력 2011-09-07 18:39


서울 화곡동 하나상담센터. 20평 남짓한 아담한 상담실은 탈북자들의 아픔을 덜어주는 곳이다. 초콜릿색과 베이지색이 배색된 ‘ㄷ’자형 소파가 놓여 있는 거실엔 햇살이 가득했다. 이곳에서 세미나와 집단상담이 이루어진다. 비밀이 보장되고 눈물과 탄식이 허용되는 개인상담실엔 크리넥스 티슈가 놓여 있다.

의학·신학·상담학을 전공한 유혜란(48·평촌 새중앙교회 북한선교회) 목사는 지난달 26일 하나상담센터를 열고 무료 상담을 시작했다. 이곳은 탈북자를 위한 전문심리치유상담소다.

“힘든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안도감을 느끼잖아요. 사선을 넘어 남한에 정착했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힘겨워하는 이들이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치유받길 바랍니다.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어서 상담센터를 열었습니다.”

11년 전, 북한에서 의사로 일하던 당시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평양에서 서울로

1998년 여름. 밖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낮에 봐둔 방향을 기억해 걸었지만 사방이 캄캄해 어디가 어디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숲 속에 숨어 있을 때 어머니는 두 손을 꼭 잡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예배당에 가야 우리가 산다.” “예배당에 가야 우리가 산다.” 의아했다. 어머니가 신앙을 갖고 계시리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그는 경성의과대학 졸업 후 6년 동안 의사로 일했다. 북한사회에서 의사는 여성들이 선호하는 직업으로 안정적인 생활을 보장했다. 그러나 친척 중 한명이 정치범으로 체포됐다. 그의 가족은 지방으로 추방돼 혹독한 어려움을 감내해야 했다. 어머니는 남한에 있는 고향에 가고 싶다고 눈물 지으셨다. 탈북을 결심했다.

천신만고 끝에 두만강을 넘어 중국 칭다오의 한 여인숙에 묵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곳에 한인살인 사건이 벌어져 공안원들이 여관을 급습, 투숙객들의 신분증을 검사했다. 독 안에 든 쥐였다. 도망갈 곳이 없었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때 어머니는 방 한구석에 무릎 꿇고 기도하셨다. ‘어머니가 어린시절 가졌던 신앙을 지금까지 지켜 오셨던 것인가.’ 성경책이 발견되면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고, 혼자만 죽는 게 아니라 온 가족이 멸절되기에 북한 체제에서 신앙을 갖는 것은 목숨과 바꾸는 일이었다.

절체절명의 시간. 신을 모른다 해도 그 순간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도와주세요! 당신이 누구신지 모르지만 저희 어머니가 믿는 당신이 우리를 구해주세요. 제발….” 소란스럽던 복도가 조용해졌다. 무슨 영문인지 공안원들이 급히 밖으로 나가버렸다.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후 중국 한인교회의 도움으로 그는 가족들과 한국으로 무사히 들어올 수 있었다.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세기45:8)

머리에서 가슴으로

생명을 건 탈북보다 더 어려운 것은 남한의 ‘편견의 벽’을 넘는 것이었다. 통일부 소속 하나원에 입소해 12주간 사회적응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실제 사회에 적응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었다. 일자리를 구하기 힘든 것은 물론 일상생활을 하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모든 것이 생소한 환경에서 남한살이는 힘들었습니다. 자녀들도 학교생활에 어려움을 겪었어요. 학급 친구들이 도시락을 함께 먹지 않는 등 따돌림을 경험해 가슴이 무척 아팠습니다.”

가족들은 의학 공부를 계속해 관련 직업을 갖길 원했지만 그는 사선에서 만난 하나님에 대해 더 알고 싶었다. 어머니가 평생 간직해 온 신앙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한신대 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서울 강남 신사동교회 부목사로 일했다. 신대원 시절 수강했던 목회상담학 수업을 통해 상처투성이 내면을 발견했다. 내면을 치유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느꼈다.

“내 안에 있는 불안과 억울함, 외로움 때문에 대인관계가 어렵다는 것을 알았어요.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한 뒤 원만한 대인관계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탈북자’란 명칭은 그에게서 빨리 떼어내고 싶은 이름표였다. 북한 체제에서 받은 상처와 탈북 과정에서 겪은 갖가지 충격을 치유받지 않고선 이곳에 적응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내면을 치유하고 하루빨리 탈북자라는 이미지를 벗고 남한사회에 흡수되고 싶었다. 2008년 연세대에서 상담학 박사과정을 시작했다.

“탈북자를 생각하면 처음엔 가슴이 아닌 머리가 아팠어요. 일이 부담스럽고 피하고 싶었어요. 그러나 타인의 아픔을 공감하는 상담학 공부를 하면서 탈북자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갖게 됐습니다. 주님이 저의 마음을 만져주셨어요. 지금 그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요. 가슴이 아픈 것은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난해부터 새중앙교회 북한선교회 담당 목사로 일했다. 또 서부 하나센터에서 상담심리사로 탈북자들을 만났다. 하나센터는 이들의 정착과 취업, 일상생활을 지원하는 기관이다. 그곳에서도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생명을 건 탈북 과정도 견뎌낸 그들에게 두려움이 없을 것 같지만 사실 현실 속에서 너무 힘들어합니다. 사회 적응을 못해 우울증에 걸리기도 하고, 목숨을 끊는 극단적인 경우도 있었습니다. 교회가 영혼 구원 차원에서 관심을 갖고 도와야 합니다.”

탈북자들은 ‘다양한 선택의 땅에 왔는데 이렇게 자유가 두려울 줄 꿈에도 몰랐다’고 절규했다. 무엇보다 그 자신이 북한이탈주민 출신이기에 누구보다 이들의 상처를 잘 알고 보듬을 수 있다고 여겼다. 탈북자 중 30%가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PTSD)을 겪는다는 보도를 접하고 전문상담실 개소를 구체화했다.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은 한번 경험했거나 반복되는 치명적인 사건을 회상하면서 지속적인 불안 증상을 나타내는 현상이다.

가슴으로 만나는 돌봄사역

그는 탈북자 사역을 ‘돌봄사역’이라고 생각한다. 돌봄사역의 첫 걸음이 심리치유다. 유 목사는 하나상담센터에서 교육과 상담, 개인상담과 집단상담을 병행한다. 육체적·영적·심리적으로 통합적인 관점에서 돕고 도움이 필요한 탈북자와 교회를 연결해준다.

“제가 의학·신학·상담학을 공부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돼요. 북한에서 남한으로 올 때 사선에서 만난 하나님이 오래 전 예정하신 일이라고 믿어요. 인생이 힘들어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다가와 손 내밀어주셨던 주님을 전하고 싶습니다.”

자아는 세상과 나를 보는 창. 이 창이 왜곡되면 세상은 온전해 보이지 않는다. 건강한 자아 회복이 필요하다. 그는 북한 체제의 억압으로 인한 상처를 방치해두면 탈북자들의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이 왜곡될 수 있다며 자아 회복 프로그램, 인식개선 프로그램, 진정한 나 발견하기, 이야기 심리치료 등을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교회마다 탈북자 사역을 힘들어해요. 성과가 눈에 금방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내가 필요합니다. 믿음의 씨앗을 뿌리기 전에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해주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가슴으로 소통하고 가슴으로 사랑하고 싶어요.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글 이지현 기자·사진 구성찬 기자 jeeh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