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염성덕] 1945명의 드라마
입력 2011-09-05 17:49
대구에서 펼쳐진 1945명의 생생한 드라마가 막을 내렸다. 언어, 피부, 생김새가 천차만별인 202개국에서 선발된 건각(健脚)들이 주인공이었다. 세계 수준에 미치지는 못하더라도 당당히 조국을 대표한 출전선수 1945명은 모두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의 주연이었다.
필자는 몇몇 종목을 제외하고는 경기 전체에 몰입한 적이 별로 없었지만 대구 대회 기간 중에는 많은 시간을 TV 앞에서 보냈다. 우사인 볼트의 출전 경기가 중계될 때는 TV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총알 탄 사나이’의 세계 기록 경신을 학수고대하며. 경기장을 찾은 관중은 물론 TV 중계를 본 전 세계 시청자들도 한마음이었으리라.
볼트 못지않게 눈길을 끄는 선수들도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선수는 ‘의족 스프린터’ 오스카 피스토리우스. 4개의 올림픽 금메달을 딴 육상 전설 마이클 존슨이 피스토리우스를 평가한 대목은 의미심장했다. “두 다리가 없는 선수가 세계선수권 출전권을 따낸 것 자체가 세계 육상의 신기원입니다.”
희망 선사한 ‘의족 스프린터’
두두두두. 존슨의 평가를 넘어 피스토리우스는 남자 400m 예선에서 질주했다. 하지절단 장애인 선수로는 처음으로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 준결선에 오른 그가 질주할 때는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결선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육상 역사에 새 장을 연 그의 역주에 찬사를 보냈다. 그는 볼트에 버금갈 정도로 이번 대회 최대의 영웅임에 틀림없다. 장애인은 물론 이런저런 이유로 낙심하고 있는 비장애인에게 불굴의 도전정신과 용기, 희망을 심어준 피스토리우스가 내년 런던 올림픽에서도 선전하기를 기원한다.
케냐 여자 마라톤 선수들은 진한 동료애로 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무리를 이루며 달리는 선수들이 물병을 들고, 마시고, 길에 버리는 장면을 보면서 저러다 뭔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걱정이 앞섰다. 한 선수가 물병을 동료에게 건네면서 자신과 동료 사이에서 역주하는 다른 선수의 진로를 방해하는 듯한 장면이 나올 때는 더욱 그랬다.
급기야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선두권의 선수들이 40㎞ 지점의 급수대에 이르렀을 때였다. 케냐의 에드나 키플라갓이 물병을 잡으려다 동료 샤론 체로프의 발에 걸려 무릎을 찧은 것이다. 키플라갓을 지나 몇 발짝 앞서 가던 체로프가 뒤로 돌아가 키플라갓을 일으켜주려 했고, 3위로 급수대에 도착한 동료 프리스카 제프투는 속도를 줄였다.
어떤 육상 경기보다 페이스 조절이 중요한 마라톤에서, 그것도 몸이 탈진해가는 상황에서, 쓰러진 동료를 챙기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하지만 서로를 격려한 선두 3인방은 결승선을 향해 달렸고, 키플라갓·제프투·체로프가 각각 조국에 금·은·동메달을 안겼다. 우승과 우정을 동시에 거머쥔 이들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바로 그 순간에 성희롱 파문을 일으킨 강용석 의원 제명안을 부결시킨 국회의원들의 ‘추악한 동료애’가 떠오른 것은 왜일까.
동료애 빛난 케냐 女 마라톤
남자 110m 허들 결선에서 다이론 로블레스의 진로방해 때문에 은메달에 그친 류샹의 대응도 기억에 남는다. ‘황색탄환’ 류샹은 9번째와 10번째 허들을 넘을 때 로블레스가 팔을 건드리고 붙잡는 바람에 중심을 잃고 막판 스퍼트에 실패했다. 부상 후유증을 딛고 4년 만에 세계 정상 복귀를 노린 꿈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된 것이다. 이만하면 로블레스를 원망할 만한데도 류샹은 그를 친구로 여긴다고 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경기 도중 기권하고 중국 팬들의 원성을 샀던 류샹, 그래서 누구보다 마음고생이 심했을 그였지만 관용과 용서의 모습을 보인 것이다. 네 탓만 하며 몸싸움을 일삼는 정치인들이 오버랩된 것은 왜일까.
염성덕 논설위원 sdyu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