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후지모토 도시카즈] 나의 추석
입력 2011-09-05 17:36
“한국미와 한국인을 누구보다 사랑했던 아사카와 다쿠미의 망우리 산소에 가련다”
며칠 있으면 추석이다. 한국의 명절 중에서 내가 가장 부럽게 생각하는 날이다. 낮에는 산들바람이 부는 산소에 가서 성묘를 하고, 밤에는 휘영청 밝은 달빛 아래서 온 식구가 모여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추석. 조상의 고마움과 가족의 소중함, 인간의 삶의 의미를 새삼스레 깨닫게 해주는 날이기도 하다.
일본에도 중추절이라고 해서 달맞이를 하는 풍습이 남아 있다. 지금도 풍습을 지키는 가정이 많아 달이 보이는 곳에 제단을 마련하고 참옥새, 싸리나무, 도라지꽃, 칡꽃 등을 꽂은 화병을 놓고 동그란 경단도 올린다. 그러나 한국처럼 휴일도 아니고 민족 대이동도 없고 추석 보너스도 나오지 않는다.
한국인들에게는 이토록 중요한 추석인데도 서울에 사는 나 같은 외국인에게는 이 날만큼 할 일 없고 무료한 날은 없다. 가게들은 다 문을 닫고, 함께 술을 마셔 주는 친구도 없다. 집에 놀러 오라고 해주는 친구도 없지 않지만 이 날만큼은 사양하는 것이 예의일 것이다. “글쎄, 추석에는 무엇을 할까?” 고민하는 내 머릿속에 문득 한 사람의 일본인 이름이 떠올랐다.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다. “그래 추석에는 선배님의 산소에 가야지.”
아사카와 다쿠미는 1891년 일본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1914년 23살 때 형이 교사를 하고 있던 서울에 와 임업시험소의 기사로서 식목사업에 종사했다. 그의 이름이 지금도 사람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은 그 누구보다 한국미술과 한국인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아사카와 다쿠미는 그때만 해도 높이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던 이름도 없는 민중들이 만든 소박한 도자기나 가구에서 한국의 미를 발견했다. 그리고 형과 함께 연구를 시작했다. 한국의 미를 널리 소개한 사람으로는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가 유명하지만 야나기 무네요시에게 한국의 미술품에 관심을 갖게 한 사람이 바로 아사카와 형제였다.
몇 년 전만 해도 아사카와 다쿠미를 아는 일본인은 많지 않았는데 올해 8월에는 그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촬영이 시작되는 등 관심이 일본에서 높아지고 있다. 고향인 야마나시현 호쿠토시에는 기념관이 생겨 한·일 교류의 장으로서 역할을 다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한국에 살던 일본 사람에 대한 평가에 나는 아주 조심스럽다. 일본인이 한국에 사는 것 자체가 한국인들에게 증오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한국의 미를 사랑했다고 해도 아사카와 다쿠미 또한 지배국 일본의 아들이다. 그도 한국인에게 미안해서 몇 번이나 일본에 돌아가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에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의 습관에 따라 한국인과 고락을 함께하면서 살려고 했다. 한국어 실력은 일본어를 잘하는 한국인이 있다고 동네 사람들이 말할 정도였다고 한다.
1931년, 아사카와 다쿠미는 급성폐렴으로 짧은 생애를 마친다. 향년 40세였다. “나는 죽어도 한국에 있을 것이다. 한국식으로 매장해 달라”는 유언대로 장례식은 한국식으로 거행됐다. 동네 사람들의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아사카와 다쿠미가 근무하고 있던 임업시험장은 지금의 홍릉수목원이다. 살던 집은 그 근처에 있었고 묘지는 이문동에 있었다고 한다. 우연하게도 모두 내가 살고 있는 집에서 걸어서 10분밖에 안 걸리는 거리에 있다. 선배님에 대해 신고를 하는 것이 도리가 아닌가 해서 나는 서울에 오자마자 망우리를 찾았다.
아사카와 다쿠미의 산소는 깔끔했다. 망우리 공동묘지에 모셔져 있는 일본인은 아사카와 다쿠미 한 사람이다. 같은 직장 동료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산소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비석에 새겨져 있었다.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 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
추석 때 한국의 산소에서는 가족들이 모여앉아 송편을 먹고 술도 마시는 광경을 많이 목격한다. 올해 추석날에는 나도 망우리에서 선배님과 막걸리를 함께 마시면서 일본과 한국의 과거, 오늘, 미래를 이야기할까 생각하고 있다.
후지모토 도시카즈 (경희대 초빙교수·전 NHK 프로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