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천 인문학] 마르틴 루터와 종교개혁의 정신 (上)
입력 2011-09-05 18:08
루터가 외쳤다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오!”
2017년 10월 31일은 마르틴 루터(1483∼1546)가 비텐베르크대학교 부속 교회당 정문에 ‘95개조의 논제’라는 제목의 문서를 걸어 종교개혁의 불씨를 당긴 지 500주년이 되는 해이다. 개신교가 세상의 빛과 소금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해 세상으로부터 모욕을 받고 있는 이 시점에 초기 종교개혁의 정신을 되새겨 보는 일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하겠다. 500년 전에 타락한 종교 현실을 목격하고 그러한 현실을 개혁하기 위해 루터가 기독교인에게 요구했던 기독교인의 정신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신부가 수녀와 결혼하다니!”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게다가 신랑은 42세였고, 신부는 신랑보다 16세나 어렸다. 신랑이 ‘도둑놈’ 소리를 들을 정도의 나이차였다. 당시에도 정상은 아니었다. 종교개혁이 시작됐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사제는 당연히 결혼하지 않아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전직 신부인 늙은 신랑은 독신생활에 대해 반대했다. 그는 결혼에 대해 확신에 차 있었다. 사람들에게 결혼을 권유하며 이렇게까지 말을 했다.
“결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오!”
하나님의 명령이라며 결혼을 적극 권유했던 이 사람은 종교개혁자 루터였다. 사실 루터가 결혼하고자 했을 때 주위 동료들은 모두 반대했다. 나이차도 그렇지만, 농민전쟁이 한창인 때라 루터의 혼인 선언은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루터의 신념은 확고했다.
루터는 1525년 6월 13일 결혼했다. 연하의 신부 카타리나 폰 보라(1499∼1552)는 수도원에서 탈출한 전직 수녀였다. 1523년 님브센수녀원에 청어를 정기적으로 헌납했던 코프는 청어를 담았던 통에 자신의 딸과 11명의 수녀를 몰래 숨겨 데리고 나왔다. 이들 가운데 루터의 아내가 된 폰 보라가 있었다. 루터는 코프의 수녀 구출을 이집트에서 유대인을 구출한 모세의 행위에 비유하며 칭찬했다. 루터는 왜 이렇게까지 칭찬했을까.
종교개혁이 일어나던 당시까지도 부모들은 순수한 신앙심으로 어린 자녀를 수도원으로 보내는 일이 많았다. 수도원에 보내진 아이들은 독신 서약을 했지만, 나중에 철이 들고 나서 서약을 철회하려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럴 경우 감금되거나 조롱을 당하거나 채찍질을 당해야 했다. 수도원 생활은 이상적이 아니었다. 강제노동과 어떤 경우에는 고위 성직자들의 노리갯감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수도원을 탈출하다 잡히면 대개 사형을 면치 못하였다. 루터는 그런 수도원의 실상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루터에게 결혼은 종교개혁의 일환이었다. 루터는 결혼을 통해 종교적 진리를 몸소 실천하고자 했다. 그는 결혼이 신이 창조한 질서를 지키는 길이고, 그것이 신의 명령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루터는 ‘탁상담화(Tischreden)’에서 “만일 결혼이라는 것이 없다면 세상은 황폐해지고, 모든 피조물이 무로 돌아가며 하나님의 창조도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루터와 다른 맥락이기는 하지만, 철학자 니체도 독신생활에 대해 이렇게 조소한 적이 있다.
“모두 수도사가 되었다면, 인류는 절멸했으리라.”
루터는 옛 동독 작센의 아이스레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한스 루터는 광산업으로 자수성가한 사람이었다.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그렇듯이, 루터의 부모는 매우 부지런했고 검소했다. 자식에 대해서는 지나치리만큼 엄격했다. 루터는 호두 한 알을 몰래 먹다가 걸려 어머니에게 피가 나도록 맞았다고 회상한 적이 있다. 아버지는 어머니 그 이상이었다. 엄격한 아버지에 대한 반작용 때문인지, 말년의 루터는 20세 되기 전까지 젊은 사람들은 즐거운 시간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루터는 법률가가 되어 사회적 성공의 길을 밟기로 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을 배반하게 되는 전혀 다른 사건이 일어난다. 루터가 집에 왔다가 학교로 돌아가던 때였다.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자 나무 밑으로 잠시 비를 피했다. 그 순간 무시무시한 벼락이 옆으로 떨어졌다. 그는 땅에 고꾸라져 광부들의 수호성인을 부르며 소리를 질렀다.
“성 안나여, 나를 도우소서! 저는 신부가 되겠습니다!”
루터는 벼락소리를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이고 수도사가 되기로 서원했다. 아버지는 아들이 수도사가 되겠다는 서원에 노발대발했다. 심지어 그 벼락소리가 사탄의 소리였다고 저주까지 했다. 그러나 루터의 결심을 막지 못했다.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신부가 되었다. 수도사가 된 루터는 누구보다 자신에게 엄격한 수도사였다. 그는 온갖 고행을 하면서 아주 사소한 자신의 행위 하나 하나까지 우직하게 참회했다. 매번 루터의 고해성사를 듣던 상급 사제인 슈타우피츠가 이렇게 놀릴 정도였다.
“간통이나 살인 같은 죄다운 죄를 짓고 와야지. 그걸 뭐 죄라고 고백하느냐.”
루터는 젊은 시절 수도원에서 벌어진 문제를 해결하려는 임무를 띠고 로마교황청을 방문한 적이 있다. 루터는 로마교황청을 방문한 기회를 이용하여 로마 순례를 한다. 로마 순례는 당시 수도사들에게는 꿈의 여행이었다. 로마 여행은 순례의 최후의 목적지였고, 면죄가 자동적으로 보장되는 곳이기도 했다. 젊은 루터도 로마 순례 여행을 했다. 그는 교황이 거주하는 라테라노 성당의 그 유명한 거룩한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올라가며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참회했다. 이 거룩한 계단은 총 28개의 계단으로 되어 있다. 이 계단은 예수 그리스도가 빌라도 궁전에 들어갈 때 올라 갔던 계단이라고 하는데, 천사들이 완전한 모습 그대로 이 계단을 로마로 옮겨 왔다고 한다. 이 계단 하나하나가 9년간의 속죄를 보증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무릎을 꿇은 계단에는 십자가 표가 붙어 있어 속죄기간이 2배로 계산되고 있었다. 연옥에 있는 영혼의 죄가 이렇게 사해질 수 있다고 사람들은 믿었다.
루터는 비록 28계단을 무릎으로 기어 올라갔지만, 속죄에 대해서는 믿지 않았다. 그는 로마에 머물면서 여러 곳을 다녔다. 기대한 것과 달리 로마에서는 상업주의와 부패의 썩은 내가 진동하고 있었다. 로마에서는 온갖 가짜 성유물 전시가 성황이었다. 모세의 불타는 장작, 가시 면류관의 한 조각, 예수의 발자국이나 유다의 은화 한 닢 등을 요금을 받고 보여주는 축제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이 성유물을 보면, 천년간 연옥의 고통으로부터 구원받는다고 선전하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로마에서는 교황 알렉산더 6세가 사생아로 얻은 자신의 딸 루크레티아와 근친상간의 죄를 범했다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었다. 교황의 친족 등용과 성직 매매는 일상이 되었다. 루터가 머물던 로마의 수도원 수도사들은 교황청에 뇌물을 주고 성직을 얻은 사제들이 이렇게 신을 향해 기도한다고 한탄을 했다.
“당신은 밥줄입니다. 언제까지나 밥줄입니다.”
루터는 로마를 방문하는 동안 로마 교황청의 부패와 종교의 타락을 직접 목격했다. 이때부터 젊은 루터의 가슴속에는 종교개혁에 대한 불꽃이 조용히 타오르기 시작했다. 루터는 이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나는 내 눈으로 교회의 부패를 보았고, 이와 싸울 것을 결심했다.”
<계속>
이동희
한국학중앙연구원 선임연구원. 한신대와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석·박사를 마쳤다. 서울대 포스트 닥터와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기획실장을 거쳤다. 저서 ‘헤겔과 자연’ ‘세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철학이야기’ ‘라이프니츠가 만난 중국’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