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역 최고령 탤런트 이순재 “오늘 드라마 오늘 찍고 시청률에 연연 서글퍼”
입력 2011-09-05 21:18
만약 국내 탤런트만을 대상으로 ‘명예의 전당’이 만들어진다면 1순위로 헌정될 배우는 누구일까. 많은 인물이 있겠지만 아마도 이순재(77)가 첫손에 꼽힐 것이다. 1961년 KBS 개국 특집극 ‘나도 인간이 되련다’를 시작으로 50년 간 연기의 길을 걸어온 그는 명실상부한 한국 드라마의 산증인이다. 실제 그는 2009년 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이 PD, 방송작가, 성우 등 전체 방송계 종사자를 대상으로 선정한 ‘방송인 명예의 전당’에 연기자 중 처음으로 이름을 올렸다. 아직도 왕성하게 활동하는 현역 최고령 탤런트로, 오랜 경력만큼이나 독보적인 연기력으로 인정받는 그의 이름이 근래 언론에 자주 오르내렸다. 이유는 ‘한예슬 파문’ 등 방송가 현안에 자주 쓴소리를 내뱉었기 때문인데 강도가 꽤 높았다. 이순재는 드라마 제작 발표회 같은 공개적 자리에서 드라마 사전제작의 필요성을 강하게 주문했다. 방송에 출연해서는 톱스타의 실명까지 거론하며 안일한 연기 태도를 따끔하게 지적했다.
이순재를 만나기로 한 건 방송가 ‘큰어른’이 전하는 이 같은 조언과 비판을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보기 위해서였다. 최근 서울 여의도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열악한 국내 드라마 제작 환경의 문제점을 거침없이 질타했다.
-국내 드라마 제작 환경의 가장 큰 문제점을 뭐라고 보시는지요.
“만약 월화드라마라면 일주일에 두 편인데, 분량으로 보면 이게 영화 한 편이잖아. 그런데 내일 방송할 걸 오늘 찍어. 결국 ‘날림’밖에 안 되는 거야. 방송사는 적어도 방송 보름 전엔 드라마를 만들어놔야 돼. 외주제작사가 찍으면 방송사가 이들과 계약할 때 ‘방송 몇일 전까진 ‘완제품’ 만들어서 보여 달라‘고 요구해야 되고. 그런데 그렇게 안 하고 있어. 방송사는 심지어 외주제작사가 만든 작품을 시간이 없어 자기들도 못 본 상태에서 내보내. 이렇게 무책임해서 되겠냐는 거야.”
-사전 제작을 꺼리는 건 사전 제작 드라마 시청률이 대부분 안 좋았기 때문인데요.
“시청자들 반응 보고 스토리를 바꿔나가야 시청률이 오른다는 건데,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드라마 작가라면 그딴 식으로 시청자한테 아부해서 안 돼. 시청자 상대로 ‘이래도 안 봐?’라는 자신감, 그런 게 필요해. 김수현 작가 같은 경우 드라마 초반 시청률 안 좋아도 걱정 하나도 안 해. 그 양반은 드라마가 앞으로 이쯤 전개되면 시청률 얼마만큼 오른다는 계산이 딱 서 있어. 작가라면 그 정도는 돼야지.”
-최근 탤런트 한예슬씨가 강도 높은 스케줄을 이유로 드라마 촬영을 거부해 문제가 됐었는데요.
“배우는 세상이 무너져도 촬영 현장을 지켜야 돼. 시청자와의 약속이잖아. 난 2008년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도 연극 무대에 섰어. 관객하고 약속이니까. 예슬이가 오죽 힘들었으면 도망갔을까 싶지만 그래도 참았어야지. 하지만 이번 일의 원인은 잘못된 제작 풍토에 있다는 게 내 생각이야. 사전 제작을 안 하니 시간에 쫓겨. PD나 작가가 신인 연기자 상대로 연기 지도할 시간도 없어. 찍기에만 바빠. 우리 땐 연기 못하면 그냥 안 넘어갔어. 제대로 할 때까지 다시 시켰지. 지금 중견 배우들은 전부 눈물 뚝뚝 흘리면서 연기 배운 사람들이야.”
-그간 젊은 연기자들 연기력에 안타까움을 많이 표시하셨는데.
“정말 훌륭한 재목들이 많아. 잘생기고 예쁘고 머리도 좋아. 그런데 급하게 드라마를 찍으니 연기가 뭔지 정리도 안 되는 상태에서 연기를 해. 연기가 ‘완성’되는 쾌감을 모르는 거야. 연기는 아주 복잡한 영역이기 때문에 훈련이 필수적이야. 그런데 이걸 배울 시간이 없어. 그럴 욕심도 별로 없어 보여. 인기 많아지면 광고 찍고 돈 버는 재미밖에 몰라. 그런 애들은 시간 지나면 그냥 사라져. 걔들이 나이 들어서 노역(老役)하고 싶겠어? 한 때의 인기 스타로 남는 거야.”
-좋은 드라마가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뭔가요.
“대본이지. 좋은 대본에서 좋은 연기가 나오는 거야. 그러려면 대본이 촬영 전에 연출자랑 의견 교환하면서 계속 고쳐져야 돼. 그런데 지금은 초고(草稿)를 갖고 바로 만드니 문제가 많지. 젊은 작가들은 경력이 짧으니까 어떤 때는 대본에 ‘간지’ ‘꼬붕’ 같은 일본어가 막 튀어나와.”
-막장 드라마도 계속해서 문제가 되고 있는데요.
“방송사는 일단 언론이잖아. 그러니 언론이 갖는 공공성이라는 사명에 우선 충실해야 돼. 잘못된 건 걸러내야지. 방송사가 시청률만 좇는 보따리 장사가 아니잖아. 또 다른 문제는 과거엔 막장이든 아니든 우리끼리 안방에서 보고 말았지만 이젠 아니라는 거야. 우리 드라마가 외국 많은 나라에 수출이 되잖아. 이야기 앞뒤도 맞고 수준도 높여야지.”
-드라마 제작진이 ‘배우 이순재’를 계속해서 섭외하는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일단 나처럼 나이 먹은 연기자가 별로 없어서겠지(웃음). 그리고 제작진들은 아마 나랑 일하는 게 편할 거야. 난 여전히 젊은 친구들하고 동등한 연기자라는 생각을 갖고 있어. 나이 많다는 이유로 특별한 요구를 안 해. 나이 먹은 사람이 촬영 현장에서 어른 행세하면 얼마나 부담되겠어. 연기자란 건 정년이 없는 만큼 계급도 없는 직업이야. 나이는 달라도 모두 똑같은 배우야.”
-드라마 촬영은 중노동이나 마찬가지인데 그걸 이겨내는 건강 비법이 있으시다면.
“굳이 이유가 있다면 젊을 때부터 술을 안 마신 것, 그리고 82년에 담배를 끊은 게 도움이 된 거 같아. 어머니가 96세까지 사셨는데, 어머니 체질을 닮아 건강한 거 같기도 하고.”
-50년간 연기하면서 안 해보신 역할이 있긴 한가요.
“거지하고 환관은 안 해본 거 같아. 지금은 시켜줘도 못하지.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베테랑 수사관 역할을 한 번 해보고 싶어. 아주 노련한 수사관. 외국에서는 일흔이 넘어서도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 드라마가 있는데, 우리나라는 최불암이 했던 ‘수사반장’이 끝인 거 같아(웃음).”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