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종석 서울 광혜내과의원 (1) 초등학생 시절 여순반란사건의 기억 생생

입력 2011-09-04 12:51


나는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살아온 이야기를 지면을 통해 하는 것도 많이 망설였다. 하지만 이제 고희를 넘겼으니 잘했건 못했건 지나온 삶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패한 부분이 있으면 실패한 것으로, 성공한 부분이 있으면 성공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본다. 믿음의 삶을 뒤이어 살아갈 사람들에게 반면교사가 되겠기 때문이다.

나는 1939년 4월 전남 보성군 벌교읍 옥정리에서 6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내 위로 누나만 네 분이 있다. 부모님께서는 딸만 내리 넷을 낳다 보니 나와 남동생이 태어났을 때 집안에 큰 경사가 난 듯했다. 지금처럼 출산율이 낮은 때였다면 나는 이 세상에 결코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난산 끝에 나를 나으셨다. 온 식구가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줄 알았다고 하니 그 고통이 어느 정도였을지 지금 생각하면 내가 태어나 지금까지 이렇게 생존해 있는 게 감사할 따름이다.

누나들은 그런 나를 끔찍이 아끼고 돌봤다. 벌교 갯벌에 나가 꼬막을 캐면서 놀았다. 누나들이 여름철 나를 데리고 놀다가 꼬막 껍질 쌓인 곳에 떨어뜨려 지금도 내 이마엔 흉터가 뚜렷하다. 마치 대한민국 지도를 그려놓은 것 같다.

내가 태어난 옥정리엔 조그만 교회가 하나 있었다. 큰누나(이삼순)가 그 교회를 다니며 예수를 영접했다. 그 뒤 누나는 순천 매산여중으로 유학을 가서 비교적 빨리 신교육을 받았다. 큰누나 때문에 우리 온 가족은 복음을 접하게 되었다.

나는 옥정리에서 걸어서 8㎞쯤 되는 칠동국민학교를 다녔다. 학교는 조그마했지만 주변 산세는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봄철 벚꽃이 필 무렵이면 온갖 꽃이 지천에 피어나 에덴동산 같은 교정을 이뤘다. 국민학교 때 담임이 이왕로 선생이었는데 운동을 아주 좋아하셨다. 나를 너무나 귀여워해주시고 공부를 잘 지도해주시던 기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하지만 이런 아름다운 기억도 5학년이 되면서 완전히 바뀌었다.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나면서 많은 사람이 전투에서 죽거나 상처를 입었다. 어떤 이들은 죽어서 내동댕이친 채로 길에 버려진 경우도 있었다. 아버지(이인찬)는 그걸 보고 집의 머슴을 시켜 산기슭 양지 바른 곳에 시체를 묻게 하셨다. 어린 심정에도 부친의 인자한 모습과 동정심이 가슴 뭉클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어머니(박남순)도 끼니를 굶는 거지를 보면 결코 그냥 돌려보내시는 법이 없었다. 반드시 푸짐하게 상을 차려 대접한 뒤에 보내셨다.

내가 의학을 하게 된 것도 어쩌면 그런 부모님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가난한 자와 병든 자를 긍휼히 여기는 부모님의 마음이 나에게도 자연스럽게 흘러 쌓였던 것이다. 당시 옥정리 1, 2구는 산골이어서 공비 출몰이 잦았다. 하룻저녁에도 한 동네에서 여러 명이 죽었다는 소식이 수시로 들려왔다. 6학년이 되어서는 옥정리에서 벌교까지 약 7.5㎞를 걸어서 피난을 가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여순반란사건은 지나간 과거의 사건에 불과하지만 난 아직도 지금의 남북 분단을 생각하면 그때의 끔찍한 장면이 너무나 생생하게 떠오른다.

◇약력=전남대 의대, 서울대 의대 대학원(박사) 졸업. 군복무 중 맹호부대 소속으로 베트남전에 참전해 야전병원 근무. 제대 전엔 한일병원 내과 레지던트 근무. 프랑스 피티에 살페트리에의대 유학. 국립의료원 내과 및 핵의학과장을 거친 후 1984년 전문 갑상선 클리닉인 광혜내과의원 개원. ‘임상 갑상선학’ 저자. 충현교회 은퇴장로.

정리=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