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김찬희] 킬리만자로의 표범
입력 2011-08-31 17:47
킬리만자로(Kilimanjaro)는 해발 5895m에 이르는 세계에서 가장 큰 휴화산이다. 탄자니아와 케냐 국경에 자리 잡은 이 산은 스와힐리 말로 ‘번쩍이는 산’이라는 뜻을 가졌다. 적도 부근에 있지만 만년설에 덮여 있어서다. 산 아래에는 울창한 숲과 관목지대, 평원이 펼쳐져 있다.
킬리만자로는 탄자니아에서 생산되는 커피를 지칭하는 이름이기도 하다. 유럽에서는 ‘커피의 신사’ ‘영국 왕실의 커피’로 불린다. 킬리만자로 남쪽 경사면에 있는 모시(moshi), 아르샤(arusha) 지방에서 나는 커피는 특히 품질이 뛰어나다. 아프리카 커피는 탄자니아, 케냐, 에티오피아가 주요 생산국이다. 세계 최대 생산량을 자랑하는 ‘빅3’이기도 했다. 탄자니아는 1892년 독일 지배를 받으면서 커피 재배를 시작했다. 1차 세계대전 뒤에는 영국이 이 땅을 점령해 산업으로 발전시켰다.
커피는 축복이 아니었다. 2차 세계대전 후 남미, 동남아시아 신생 독립국가들이 커피 재배에 뛰어들면서 아프리카 커피는 외면 받았다. 가격이 폭락하자 커피를 재배하면 할수록 더 가난해졌다. 더 많은 커피를 생산하기 위해 더 많은 나무를 베고 더 많은 농약을 뿌렸다. 현재 탄자니아 인구 7%가 커피 산업에 종사하고, 그 가운데 90% 이상이 소규모 농가다. 탄자니아 국민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500달러 수준이다.
1973년 작은 변화가 첫 걸음을 뗐다. 네덜란드의 한 교회가 에티오피아 커피 농가를 찾았다. 이들은 작은 협동조합에서 생산한 유기농 커피를 비싼 값에 사들이기로 했다. 공정무역 커피의 시작인 셈이다. 공정무역은 최근 바나나, 옷, 신발 등으로 확산되고 있다. 출발은 약탈자들의 반성 혹은 박애(博愛)였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공생(共生)’의 모습을 띠고 있다.
‘공생’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2011년 대한민국에서 뜨거운 화제다. 이명박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에서 ‘공생 발전(Ecosystemic Development)’을 꺼내들면서다. 정부와 재계는 모두 대통령 눈치를 보며 분주하다. 대기업 오너들은 앞 다퉈 개인 재산을 털어 사회공헌 재단을 세우고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겠다고 외친다. 그런데 뭔가 불편하다. 이게 전부일까.
킬리만자로는 드넓은 초원을 품고 있다. 초원과 기업이 활동하는 시장은 흔히 약육강식을 설명하는 공간으로 대표된다. 뺏고 뺏기며, 먹고 먹히는 그곳에서는 오직 ‘힘’만이 진리로 보인다. 그러나 초원에는 약육강식보다 더 강력한 규칙이 있다. 바로 균형이다. 초식동물은 어리거나 병 들거나 쇠약해 무리를 따르지 못하는 놈부터 잡혀 먹힌다. 건강한 무리를 유지하고, 초원이 사막으로 황폐화되지 않도록 개체수를 조절한다. 절대강자로 불리는 사자의 새끼는 하이에나에게 쫓기고 죽임을 당한다. 치타나 표범도 마찬가지다. 맹수들끼리 균형점을 찾는 것이다.
생태계 균형은 공생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초식동물이 사라지면 생태계는 붕괴한다. 건강한 중소기업이 없으면 기술 혁신과 시장 발전은 기대할 수 없다. 맹수도, 대기업도 결국 굶어 죽는다. 중소기업을 자신만의 ‘동물원’에 가두고, 동물원 밖 중소기업은 깔아뭉개는 탐욕으로는 공생이 불가능하다. 그동안 정부가 펼친 친(親)기업 정책으로 대기업들은 천문학적인 수익을 올렸다. 우리 사회는 대기업이 잘 굴러가야 나라 경제가 좋아지고, 중소기업·하도급업체에도 돈이 돈다는 ‘폭포수론(論)’을 믿었다. 하지만 폭포수는 없었다. 골목길 슈퍼마켓부터 두부·순대까지 모두 대기업의 사냥감일 뿐이다.
이제라도 대기업들은 공생과 균형을 고민해야 한다. 오너가 사재를 터는 사회공헌 활동은 훌륭하다. 그러나 공생과는 거리가 있다. 스스로의 생존을 위해 눈 덮인 킬리만자로 산등성이를 걷는 고독한 표범이 되는 것은 어떨까. 공생과 균형을 고민하는 표범 말이다.
김찬희 경제부 차장 c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