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슬림의 땅, 빈민들의 ‘브라더’… 16년 방글라데시 복음 박천록 선교사
입력 2011-08-31 20:10
“사랑하는 나의 친구들이여. 다시 그대들을 만날 수 있기를 소원하며 주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 서로 다시 만날 그날을 사모하며 소망 가운데 기다립시다. 그러나 어쩌면 이 땅에서 다시 못 만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럴지라도 우리 낙심하지 맙시다. 이 땅의 삶은 잠시 지나가는 나그네의 삶입니다. 행여 우리가 이 땅에서 못 만나면 저 천국에서 꼭 만납시다.”
방글라데시에서 16년 동안 지내다 들어온 박천록(53) 선교사가 자신의 심경을 표현한 글의 일부다. 간절한 그리움과 가슴 아린 안타까움이 담겨 있다. 꼭 만나야겠다는 의지도 들어 있다. 혹시 있을지 모를 나쁜 상황에 대한 대안도 담겨 있다. 도대체 무슨 사연이기에 그는 이런 글을 써야 했을까. 전남 목포에 머무르고 있는 그를 최근 만났다. 수더분한 인상이면서도 예리한 눈빛이 느껴졌다.
추방자
“방글라데시 정부로부터 추방된 지 3년이 다 됐습니다. 현지 이슬람 세력이 내 이름을 블랙리스트에 올려 다시 들어갈 수 없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무슬림들을 강제 개종시켰다는 억지를 부리는 것이죠. 2003년에 이어 두 번째 추방입니다.”
박 선교사는 이번 추방 직후 1년 안에는 다시 들어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방글라데시 국내법에 조금도 저촉된 일을 하지 않았고, 지금껏 그들에게 해준 일이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거기다 현지에서 수많은 이들이 그의 입국을 촉구하고 있기도 했다. 한데 결코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갑갑하고 답답한 마음 이루 말할 수 없죠. 하지만 조급해하지 않기로 했어요. 주님의 위로를 느끼고 있습니다. 주님의 또 다른 뜻이 있을지도 모르고요. 기도할 때마다 그런 생각이 자꾸 듭니다. 다행히 현지 사역자들이 나름대로 잘 해가고 있고요.”
박 선교사가 방글라데시에서 한 일은 대단하다. 주로 빈민가 사역을 해온 그는 몰라떽교회를 비롯해 통기교회, 도킨칸교회 등 3곳의 교회를 개척하고 초등학교 2곳, 양로원 1곳을 세웠다. 특히 현지인들에게 ‘브라더’라 불리면서 각종 구제에 들인 공은 현지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다. 그러면서 적어도 1만명의 무슬림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종교의 자유가 있다지만 이슬람 국가인 방글라데시에서 강압적으로 무슬림들을 개종시킬 수 없습니다. 그들을 도우면서 복음을 전하면 그들 스스로 개종하고 세례에 임합니다. 한 달에 수십 명, 때론 100명 이상에게 세례를 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면 강력한 성령의 역사를 느끼죠.”
그랬던 그의 한국 생활은 아무래도 한가할 듯했다. 선교지를 떠난 선교사가 할 일이 별로 없을 것이 아닌가. 인터뷰 시작 즈음에 그 스스로 ‘백수’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꾸준히 현지와 연락하면서 간접적으로나마 일을 챙기고 있었다. 인터뷰 중에도 두 차례나 현지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리고 나름대로 국내 활동을 하고 있었다.
“가끔 선교 관련 세미나 등에 나가 강연을 합니다. 단체나 교회로부터 집회 인도 요청이 오기도 하고요. 그리고 이것저것 나름대로 할 일을 찾기도 하죠. 덕분에 방글라데시 생활 16년 동안의 각종 일화를 정리해 최근 책도 한 권 냈습니다.”
사명자
‘사명’(예영커뮤니케이션)이라는 그의 저서는 한 마디로 그의 선교 보고서다. 무슬림이 90%나 되는 방글라데시에서 구제와 학교 사역, 교회 개척, 부흥집회 등으로 도전해가는 이야기들을 담았다. 테러 위협 속에서 일하는 어려움, 빈곤과 부패 속에서 혼돈에 빠진 소중한 영혼들, 이슬람 세력의 폭력과 탄압 속에 고난과 핍박을 당하는 초기 성도들의 애환 등이 소상하게 기록돼 있다. 그리고 선교사와 성도들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 그분의 예비하심과 역사하심이 감동적으로 그려졌다. 지금 방글라데시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도행전적 부흥의 현장이 소설이나 드라마보다 더 흥미진진하게 묘사되기도 했다.
“‘Calling for Bangladesh’라는 제목으로 영문판을 만들 계획입니다. 제가 해온 방글라데시 선교 사역을 발판으로 세계 교회가 100년의 선교 전략을 수립하기를 소원합니다. 방글라데시를 위해 목숨 거는 사명자들이 계속 나오기를 바라며 기도합니다.”
박 선교사는 ‘사명’이라는 단어를 좋아했다. 아니 그 단어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건 듯했다. 그가 풀어놓은 이야기 속에는 사명자로서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해, 4차원 믿음으로 무장하기 위해, 목숨을 걸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역력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는 성경 구절을 몇 번이나 인용했다. 그랬다. 그에게선 강단이 느껴졌다. 어쩌면 그 점이 추방으로 연결됐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격적인 선교에 대한 비판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슬람 지역, 더 구체적으로 방글라데시의 특수성을 알면 그럴 수 없습니다. 주님의 시각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고요. 영적인 전쟁터를 오래 누빈 사람으로서 나름대로 최선의 방법으로 사역했다는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4차원 믿음이 없이는 선교를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만을 듣는 믿음이죠. 물론 화끈한 걸 좋아하는 개인 기질의 영향도 있겠지요.”
빚진 자
사명에 관한 이야기가 길어지면서 결국 개인 이야기로 이어졌다. 예수를 믿기 이전과 이후의 반전은 짜릿한 간증과 함께 시한부 생명을 통보 받았다. 절망 가운데서 누군가의 권유로 예수를 영접하고 일주일 금식기도를 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었다. 건설회사에서 일했다. 술과 담배, 향락에 찌들었다. 어느 날 폐병 말기 진단을 만나고 병을 고쳤다. 그분의 부르심을 받아 신학을 공부하고 교회를 개척해 4년간 섬겼다. 방글라데시에서 있던 이정숙 선교사를 만나 결혼하고 동역하게 됐다.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는 말이 흔하게 쓰이지만 영락없이 나에게 적용되는 말입니다. 주님께 진 빚이 너무 크고 많아 선교사가 됐는데, 그 이후에 진 빚은 더 감당하기 어렵네요. 고비마다 도와주고 건져주고 이끌어주신 그분을 어떻게 필설로 나타낼 수 있겠어요?”
그는 현지에서 있었던 일화 몇 가지를 소개했다. 특히 이슬람 세력 및 불량배들과의 살벌한 싸움에서 이겨낸 이야기 등은 참으로 흥미진진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이영훈 목사는 지난 4월 주일예배 설교에서 박 선교사의 이야기로 4차원 믿음을 설명하기도 했다.
그랬던 그가 추방 상태로 3년을 지냈다. 스스로 돌파구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계획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그는 얼마 전 현지 사역자로부터 들었던 말을 소개했다. “브라더. 우리는 당신이 어떻게 일했는지를 보고 배워서 압니다. 우리가 그렇게 해갈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이 교회와 학교에 계실 때는 브라더가 한 명이었지만 지금 여기에는 수십 명의 브라더가 있습니다.”
여러 상황을 고려하겠다는 그의 의지가 느껴졌다. 다시 들어가지 못할 경우 후방에서 계속 사역하겠다는 그의 우회적 표현이었다. 그는 최근 ‘LB(Love Bangladesh) 선교회’를 새로 정비하기 시작했다. 이 사모가 현지를 들락거리면서 일을 챙기고 있다. 그럼에도 그의 마음속에서 타오르는 그리움의 불길은 뜨거웠다.
“‘할렐루야, 브라더’ 하며 반가워하던 그곳 사람들이 미치도록 보고 싶네요. 첫 추방 때 2년 만에 들어갔지만 이번엔 조금 더 길어진다고 위안하고 있습니다. 방글라데시에서 선교사 직분을 부활시켜 주실 전능하신 주님을 믿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글 정수익 선임기자·사진 곽경근 기자 sag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