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항 소년, 유럽 오페라 무대 주역 되다… 독일 뉘른베르크 국립극장 솔리스트 김대영씨
입력 2011-08-31 19:49
서구인들의 편견과 텃세가 심한 유럽 오페라 무대에서 당당히 주역가수로 활동하고 있는 한국인 성악가 김대영(31)씨. 독일 뉘른베르크 국립극장 솔리스트로 활약하고 있는 그는 2008년 세계적인 콩쿠르 ‘닥터 루이시갈 국제컴피티션’에서 2위를 수상, 동양인으론 처음 성악부문 입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여름휴가를 보내기 위해 일시 귀국한 그를 지난 26일 만났다.
“나의 삶 속에 감사하는 일들이 자꾸 생길 때 누군가 날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요. 특히 힘든 일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날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용기가 나요. 그 기도의 힘으로 지금까지 온 것 같아요.”
그의 화려한 프로필 뒤엔 예측하기 힘든 삶의 흔적이 숨어 있다.
오페라 가수를 꿈꾸던 소년
그가 처음부터 노래를 잘했던 건 아니었다. 어린이 성가대 오디션에서 번번이 떨어졌다. 교회 전도사였던 아버지의 ‘빽’을 써도 안 통했다. 그래도 도전하는 자의 꿈을 꺾을 수 없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성가대에 합격한 후 너무 기뻐서 어린이 찬송가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목청껏 불렀다. 성가연습시간은 행복했다. 그 시간을 통해 노래하는 방법을 배웠다. 중학교 1학년 때 울산시 성악경연대회에서 1등을 하면서 막연히 유럽의 오페라단에서 노래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소년은 질풍노도와 같은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 중·고교 시절 통틀어 10번의 전학을 했다. 목회자였던 아버지의 사역지를 따라 전학한 경우도 있었지만, 그중 몇 번은 학교에서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사고를 쳐 전학을 한 경우였다. 그의 거칠고 어두웠던 내면엔 아픔이 있었다. 예고에 진학해 성악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개척교회를 하는 부모님의 상황을 너무나 잘 알기에 떼를 쓸 수조차 없었다.
공업고등학교 전기과에 입학한 후 ‘성장통’이 시작됐다. 공부는 뒷전이 됐다. 하교 후엔 책가방 속에 넣어둔 사복으로 갈아입고 노래방, 커피숍, 당구장을 순회했다. 1년 정도 지나자 그것도 지겨웠다. 무단결석을 했다. 2주 만에 엄마가 사실을 알게 됐다. 집 앞 놀이터 그네에 엄마와 나란히 앉았다. “대영아. 미안하다. 하고 싶은 거 못해줘서….” 호되게 꾸중할 줄 알았는데 엄마는 그의 손을 잡고 울먹였다. 아버지가 개척교회를 시작한 때였다. 지하교회에 돗자리를 깔고 벽돌을 쌓아 강대상을 만들어 가족들이 예배드렸다. 지금 울산 주광교회(김성렬 목사)의 시작이었다. 엄마는 아들이 원하는 성악공부를 시켜 주지 못해 아팠던 마음을 그렇게 말했다. 엄마는 사모였지만 가정경제를 책임지기 위해 학습지 교사, 선교원 교사, 가사도우미 등 몸이 부서져라 일을 했다. 아들의 마음속 깊이 박힌 분노의 빙산은 차츰 녹아 내렸다.
좌절은 없다
그렇지만 가난한 환경은 달라지지 않았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막노동, 음식점 서빙, 스티커 붙이기 등 아르바이트를 했다. 인생의 가장 막막했던 시절이었다. 첫 월급을 탔다. 열두 살 아래 동생에게 옷을 사주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멀리 ‘성악학원’이란 간판이 보였다. 자신도 모르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노래 배우고 싶어서 왔어요.” 그의 노래를 들은 원장은 당장 성악공부를 시작하자고 했다. 그는 “저의 아버지가 개척교회 목사라 학원비 낼 형편이 안돼요. 아이들한테 음악기초 정도는 가르칠 수 있어요. 그리고 매일 학원 청소도 할게요. 레슨해 주세요.” 원장은 갑자기 큰 소리로 웃으며 “우리 아버지도 개척교회 목사님이셨단다. 내가 그 맘 잘 알지”라고 했다. 원장은 성심을 다해 무료레슨을 해주었다.
서울 계원예고에 입학했다. 철들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이를 악물고 연습했다. 학교 연습실에 이른 아침 들어가 늦은 밤 나왔다. 고3 때는 전국의 유명한 콩쿠르를 휩쓸었다. 당시 서울에 연고지가 없어 셋방을 얻어 살았다. 주인집 식구들과 나눠 먹으려고 순대를 사왔는데 그들은 스테이크를 먹고 있었다. 혼자 방에 들어와 그 많은 순대를 꾸역꾸역 먹으며 눈물도 삼켰다. 오히려 힘든 환경 속에서 철들기 시작했다. ‘이 시간을 견디면 나는 더 성장하고 발전할 것이다.’
그는 공업고등학교에서 예술고등학교로, 수원대 음대에서 한국예술종합학교로 다시 입학했다. 남들보다 돌아서 가는 듯했다. 이후 그는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졸업한 뒤 독일 뉘른베르크 음대로 유학을 떠났다. ‘닥터 루이시갈 국제컴피티션’에 입상해 군 면제를 받아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보다 솔리스트가 빨리 되었다. 그동안 국내 슈베르트·음악춘추·난파음악·중앙음악 콩쿠르에 이어 해외에서는 이탈리아 안셀모 콜차니·독일쾰른음악 콩쿠르 등에 입상했다.
회복
2008년 칠레에서 열린 ‘닥터 루이시갈 국제컴피티션’ 콩쿠르를 앞두고 있을 때였다. 국제전화가 걸려왔다. 아버지였다. 수화기 너머 목소리는 젖어 있었다. “그동안 네게 너무나 많은 상처를 주었다. 그 상처가 마음에 쓴 뿌리가 돼 너의 성장을 가로 막는 것 같아 미안하다. 용서해다오. 지금까지 아버지가 미웠던 거 다 말해보렴. 욕을 해도 좋다.”
너무나 뜻밖의 전화였다. 그러나 기억은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그는 아버지보다 빨리 달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아버지의 체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기억했다. 어린시절 폭력적인 아버지가 무서웠다. 사춘기 땐 아빠가 죽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그 이야기를 듣던 아버지는 미안하다는 말만 하시며 우셨다. “아들아, 내가 말만 목사였지 아이였어. 철이 지금에서야 들었다. 아비를 용서해다오.” 국제전화는 2시간 동안 울먹이는 대화로 이어졌다.
당시 아버지는 교회가 성장하지 않고 계속 침체되자 목회자인 자신이 먼저 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내와 함께 목회자 내적치유세미나에 참석했다. 이때 아버지는 3일 밤낮을 울며 아내에게 용서를 구했다. 그리고 며칠 후 아들에게 국제전화를 한 것이었다.
“예전엔 하나님이 아버지처럼 무서웠어요. 잘못하면 금방이라도 벌을 주실 것 같았어요. 그런데 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을 경험한 후 하나님은 제게 ‘벌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복 주시는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일들이 잘 풀려나갔어요.”
단역배우에서 주역배우로
오페라를 자신들의 전유물이라고 여기는 서구인들의 오랜 관습에다 동양인 성악가가 낱말 하나만 발음을 잘못 내도 당장 트집을 잡을 정도로 까다로운 유럽 오페라의 풍토에서 버텨내는 것은 만만치 않다. 남들보다 몇 배 노력했다. 언어를 잘 구사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단원들에게 다가가 친해지려고 노력했다.
뉘른베르크 음대에서 마이스터 과정을 마친 그는 오픈스튜디오에서 일했다. 젊은 성악가들에게 무대에 오를 기회를 주는 곳이었다. 모든 배역이 기회이자 시험이었다. 2년 동안 주어지는 역할에 최선을 다했다. 2010∼2011년 시즌부터 전속 솔리스트로 활동했다. 유럽의 A급 극장 솔리스트는 누구나 꿈꾸는 자리다. 뉘른베르크 국립극장은 A급 극장이다. 얼마 전 신인급 가수가 하기 힘든 바그너의 오페라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에서 달란트 역할을 잘 해내 호평을 받았다.
독일 뉘른베르크 국립극장은 오페라, 발레, 연극이 상시 공연된다. 1년 동안 무대 위에 올라오는 오페라만 16∼17개다. 한 작품당 5∼20회의 공연을 한다. “한 시즌에 80번의 오페라 공연을 해요. 콘서트까지 합하면 100번 이상 무대 위에 올라갑니다. 무대 위에 설 때마다 하나님은 나의 마음을 만져주십니다.”
그는 2009년 뉘른베르크 음대에서 만난 서승희(28)씨와 결혼해 슬하에 8개월 된 딸 하담이를 두었다. 아버지가 목회하는 울산 주광교회에서 아버지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어느 날 친구가 “부모님이 널 위해 아무리 뜨겁게 기도하셔도 네가 기도를 안 하면 열매를 맺을 수 없어. 너의 기도가 합해져야 해”라고 말했다. 정말 그랬다. 돌이켜보면 모든 일이 풀릴 때는 부모의 기도와 자신의 기도가 맞물릴 때였다. “하나님은 좋을 것은 한번에 주시지 않았어요. 모두 두 번째 주셨어요. 그 이유는 기도하게 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아요. ‘기도하지 않고 흥한 것은 그것 때문에 망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어려운 순간마다 기도했다가도 일이 해결되면 붕어처럼 까맣게 잊어버리거든요.”
그는 복음성가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를 좋아한다.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찬양이기 때문이다. 또 지난 시절 탈선하는 아들을 바라보는 부모님의 마음을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소년시절의 꿈을 실현한 그는 질풍노도의 시기에 있는 청소년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꿈을 가지고 있으면 그 꿈이 반드시 우리를 인도해 줍니다. 매순간 기도하며 그 길을 주님께 물으며 가십시오.”
글 이지현 기자·사진 구성찬 기자 jeeh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