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정의 바둑이야기] 여자 기사들의 반상 탈출기
입력 2011-08-31 17:31
여름을 아쉬워하는 늦더위에 힘입어 지난달 28일 여자 기사들이 반상 탈출을 시도했다. 29일부터 예정됐던 여자프로시합이 연기되자 여자 기사들의 일상을 담고 싶어 하던 타이젬 김종서 작가의 제안과 경기도 가평에 위치한 모 리조트의 후원으로 갑작스런 여행 행운이 찾아온 것이다.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를 달려 청평호에 도착했다. 갓 입단한 새내기 기사부터 프로 15년이 넘은 기사들이 한자리에 모였지만 누구라 할 것 없이 모두 청평호에 몸을 던졌다. 바나나 보트, 플라잉 피시 등을 타다 물에 빠지고 허우적거려도 기사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서로 머리를 맞대고 승부를 하고 있어야 할 상황인데 물놀이를 함께 하면서 스트레스를 날리고 있으니 얼마나 즐거운가. 한바탕 물놀이가 끝나자 야외 바비큐 파티장에서 고기를 구워 먹고 에너지를 충전한다.
그 뒤로는 김종서 작가가 준비한 다양한 놀이가 이어졌다. “바둑계에도 새로운 놀이문화가 필요하다”며 ‘바둑 골든벨’ ‘미니 체육대회’ 등 처음 접해 보는 다양한 게임이 준비됐다. 초등학교 때나 봤던 오자미와 바구니, 활, 보드판 등을 통해 단체전으로 승부를 가르다 보니 모두의 눈빛이 다시 빛난다.
밤은 점점 깊어 가는데 흥은 깨질 조짐이 보이지 않더니 기어코 노래 경연으로 이어졌다. 시원한 가창력과 화려한 댄스 등 정적인 바둑을 직업으로 삼은 여자 기사들이라는 선입견으로는 절대 상상할 수 없는 풍경들이 펼쳐졌다. 저런 끼들을 지금까지 어떻게 숨기고 살았을까 놀라울 따름이다.
평범하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낸 기사들에겐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멍에가 있다. 참고 기다리고 억누르며 지내온 시간들…. 스스로를 이겨야 하고 상대를 외면해야 하는 강인함 뒤에는 늘 고독이라는 그림자가 함께했다. 자정이 지났는데도 기사들의 이야기는 끝날 줄을 모른다.
인생 목표였던 ‘프로’가 됐다는 성취감도 잠시뿐 앞으로의 길은 더 뿌옇게만 보일 뿐이다. 둥그렇게 둘러앉아 저마다의 고민을 하나씩 털어 본다. 같은 길을 걷고 있는 동료들이라 십분 그 마음을 이해하고 어루만져줄 수 있다. 선배들은 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만큼 조금 더 쉽고 안전한 길을 일러주기도 한다.
한국의 바둑프로기사는 총 261명. 그중 여자기사는 47명이다. 평범하지 않은 직업을 가진 탓에 부드러움보다 강인함이 돋보여 여성으로서의 어려움도 많다. 하지만 그들은 입을 모아 이야기한다. “다시 태어나도 바둑기사가 되고 싶다고.”
<프로 2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