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손수호]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입력 2011-08-30 18:07

이민아 변호사가 쓴 ‘땅끝의 아이들’에는 아버지 이어령 선생에 관해 서운해하는 대목이 나온다. 아버지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을 수 없었던 어린 시절이 상처로 남았고, 일찍 결혼했던 것도 그 사랑의 결핍을 채우기 위한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글 쓰는 시간이 되면 냉정하게 딸을 품에서 밀어내던 아버지였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27세. 실제로 이민아의 유년기와 이어령의 왕성한 활동기는 겹친다. 저 유명한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도 이어령이 29세에 집필했으니 세 살짜리 어린 딸의 재롱을 멀리하며 집필을 위해 문을 거는 필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1962년 8월 12일부터 10월 24일까지 경향신문에 연재하는 동안 마감의 압박도 심했을 것이다.

그렇게 쓰인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는 지금까지 250만부가 팔린 롱셀러다. 칠순에 펴낸 30권짜리 ‘이어령 라이브러리’의 첫 권을 장식할 만큼 기념비적 저작이다. 이 책이 대만에서 출간되었을 때 중국 철학자 임어당은 “아시아의 빛나는 거성”이라고 칭송했고, 영문 번역서는 미국 컬럼비아대학의 교재로 쓰였다.

한국인의 의식을 적나라하게 해부한 책은 1960년대 산업화 사회의 어두운 그림자까지 조명함으로써 당대의 자화상으로 읽혔다. 제목의 ‘흙’ 역시 우리의 피부 빛을 묘사한 것이었고, 다른 나라의 문화와 비교하며 우리 문화에 대해 가하는 비판은 통렬한 채찍질에 다름 아니었다. 사랑에 빠진 남녀는 그의 글을 베꼈고 문학청년들은 정성껏 필사했다.

책은 학자 이어령의 지적 탐험이기도 했다. 가령 이 책에서 한복의 바지를 무식함의 상징으로 묘사했으나 나중의 저서에서는 신체에 대해 자유를 주는 포용의 미덕을 옹호하는 식이다. 생각의 깊이에 따라 달라진 시각을 당당하고 담백하게 보여주는 이어령 글쓰기의 힘이다.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출간 50년을 기념하는 속편이 9월부터 월간지 ‘문학사상’에 실린다고 한다. 나이를 무색케 하는 이어령의 창의력은 그동안 ‘디지로그’ ‘젊음의 탄생’ ‘지성에서 영성으로’ 등의 저술에서 확인할 수 있었지만 이번 연재에 거는 기대는 남다르다.

드넓은 지식의 바다, 존재의 정치망을 흔드는 문제의식, 생명력으로 출렁이는 스토리텔링, 그리고 미려한 문장과 눈부신 레토릭. 이어령은 이번에는 또 어떤 글로 독자들을 매료시킬까, 시대의 어둠을 밝히기 위해 어떤 지성의 등불을 준비했을까.

손수호 논설위원 nam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