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김진홍] ‘착한 부자’ 더 나와야 한다

입력 2011-08-29 19:06


지난 봄 경북 안동에 있는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에 다녀온 적이 있다. 강사는 선비 정신을 계승해야 한다면서 선비의 한 덕목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강조했다. 그러면서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훈에 따라 나눔을 실천한 ‘경주 최부자(富者)’ 영상물을 보여줬다. 경주 최부자는 본받아야 할 인물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왠지 허전했다. 경주 최부자가 살던 때와 비교할 때 경제규모가 훨씬 커졌으나 경주 최부자 만한 ‘착한 부자’가 떠오르지 않아서다. 수련원이 위치한 경북 지역에도 부자들이 적지 않을 텐데, 이들에게 경주 최부자는 무엇일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본받을만한 ‘칼레의 시민’

우리나라에 ‘경주 최부자’가 있다면, 서양에는 ‘칼레의 시민’이 있다. 프랑스 북부의 작은 도시 칼레(Calais). 그곳 시청 광장에는 칼레를 구한 지도층 6명을 기리는 오귀스트 로댕의 작품이 있다. 이야기는 영국과 프랑스 간 백년전쟁 막바지인 134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군은 칼레시를 포위한 채 존경받는 시민 6명이 모자와 신발을 벗고 영국 왕에게 성문 열쇠를 바친 뒤 교수형을 당해야 한다는 항복 조건을 제시했다. 전의를 상실한 칼레 주민들이 6명을 어떻게 선발할지 고민에 빠졌을 때 거부(巨富), 시장, 귀족 등이 목숨을 내놓겠다고 자발적으로 나섰다. 결론은 해피 엔딩이다. 이를 전해들은 영국 왕 에드워드3세의 왕비가 간청해 사형집행이 취소된 것이다.

목숨까지 기꺼이 내던지려 한 ‘칼레의 시민’ 정신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최근 재정적자에 직면해 휘청이고 있는 프랑스와 미국의 슈퍼 부자들 사례가 이를 증명한다.

프랑스 갑부 16명은 “우리에게 세금을 더 부과해 달라”고 청원했다. 이들은 프랑스와 유럽의 경제 시스템 속에서 많은 혜택을 받아온 만큼 프랑스 운명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기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물론 프랑스 시민들이 큰 힘을 얻었을 것 같다.

세계 최고 부자인 미국의 워런 버핏은 2주 전쯤 뉴욕 타임스 칼럼을 통해 부자 증세 논리를 거듭 폈다. 미 정부에 부자들로부터 세금을 더 걷으라고 촉구한 것이다. 의회로부터 오랫동안 보호를 받았다면서 부자들을 더 이상 감싸지 말라는 말도 했다. 그를 투기꾼이라고 비난하는 이도 있지만, 전 재산의 99%를 기부하겠다는 약속을 착실히 이행하고 있는 점은 평가할 만하다.

요즘 우리나라 슈퍼 부자들이 잇달아 사재를 내놓은 점은 긍정적이다. 현대중공업 최대주주인 정몽준 한나라당 의원이 2000억원을 아산나눔재단에 기부한 데 이어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이 5000억원에 이르는 주식을 저소득층 우수 인재 발굴을 위해 해비치 사회공헌문화재단에 기부했다. 머지않아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도 기부할 것이란 소식이다.

정 회장과 이 회장의 경우 비자금 조성이나 배임 등의 혐의로 재판을 받던 중 사회 공헌을 약속한 점이 기부 의미를 다소 퇴색시킬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로라하는 그룹 총수들이 회삿돈이 아닌 개인 돈을 냈거나 낼 예정이어서 부자들 기부 문화에 일대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는 기대를 갖게 한다.

富의 대물림 자제해야

우리나라 슈퍼 부자들은 더 바뀌어야 한다. 먹고살기 힘든 이들도 기부에 동참하는 시대다. 부의 극단적 쏠림은 사회적 갈등을 촉발시켜 부자들에게 부메랑이 될 수도 있다. 무엇보다 부의 대물림을 자제해야 한다. 그리고 외국의 부자들처럼 나라가 어려우니 돈 많은 우리들에게 세금을 더 걷어달라고 스스로 요청하는 단계까지는 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때쯤 되면 “우리나라엔 왜 나쁜 부자만 있나”라는 여론도 수그러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누가 알겠는가. ‘칼레의 시민’과 같은 작품이 시민들 모금으로 서울 광화문이나 시청 앞에 세워지는 날이 올지.

김진홍 논설위원 jhong417@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