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이철환] 침묵의 소리

입력 2011-08-29 17:49


“평화로움 속에서 삶의 본질 바라보면 멀리 별들의 노랫소리 들을 수 있어”

지인의 초대로 영화 시사회에 갔다. 이벤트로 배우들의 레드카펫 행사가 있었다. 배우들이 화려한 카펫 위를 걸어 들어올 때마다 관객들은 환호성을 보냈다. 비명과도 같았다. 관객들이 모든 배우들에게 환호성을 보내는 것은 아니었다. 무명 배우가 들어올 때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무명배우를 바라보며 쟨 누구야? 라고 속삭이듯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유명배우들은 대부분 혼자 들어왔는데 무명배우들은 대부분 혼자 들어오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에게 무관심한 관객들 사이를 혼자 걸어 들어오기 민망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레드카펫을 지나가는 그 짧은 시간의 외로움과 민망함을 견디기 위해 무명배우들은 동행한 사람과 중요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나누었을지 모른다. 아무도 열광하지 않는 레드카펫을 걸으며 무명배우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유명한 배우가 되겠다고 그들은 결심했을 것이다. 꿈을 이루지 못한 무명배우의 상대적 절망을 안쓰럽게 바라보는 관객들은 거의 없었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불안 속에 산다. 명예에 대한 욕망, 돈에 대한 욕망, 인간적 삶에 대한 욕망. 이런 것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쫓기듯 살아가고 있다. 죽음에 대한 불안과 실직이나 실패나 상실에 대한 불안으로 삶은 평화롭지 않다.

인간의 욕망은 참으로 변덕스럽다. 꿈에라도 갖고 싶었던 것을 갖게 되면 말할 수 없이 행복할 것 같았는데 그 행복감이 생각보다 오래 가지 않는다. 경험해본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끊임없이 욕망하고, 그 욕망은 세상을 움직이는 동력이기도 하다. 내 삶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무엇이고, 중요하지 않은 것은 무엇일까?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삶의 본질이 무엇이고 인간학의 본질은 무엇인지 먼저 고민해야 할 것 같다.

본질이란 어떤 것의 참모습 혹은 실체를 의미한다. 사물이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사람은 사실만 바라보는 사람이다. 사실만 바라보는 사람은 자칫 잘못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문제의 본질을 보려는 사람은 사실만 가지고 말하지 않고 사실 너머에 있는 사실을 보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향해 질문한다. 이를테면, 본질을 보려는 사람은 자신을 무시한 사람을 비난하기 전에, 나는 저 사람을 무시한 적이 없는가? 하고 스스로에게 먼저 질문할 것이다. 본질을 보려는 사람은 상대방의 관점으로도 사건이나 상황을 보려고 노력한다. 나만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문제의 본질을 벗어나기 쉽기 때문이다. 나만의 관점으로 바라본다는 건 때때로 얼마나 폭력적인가.

생텍쥐페리는 ‘어린왕자’를 통해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건 단지 껍질에 불과하다고,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본질적인 것들은 마음으로만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의 역설은 풍요든 궁핍이든,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아름다운 것이든 추한 것이든,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결코 하나의 의미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문명과 멀리 떨어진 오지 사람들은 별들의 노랫소리를 듣는다고 한다. 우리가 별들의 노랫소리를 들을 수 없다 해서 그들의 말을 부정할 순 없다. 첨단과학의 힘을 빌려도 세상엔 들을 수 없고 볼 수 없는 것들이 많다. 어쩌면 별들의 노랫소리를 듣기에 우리의 내면이 너무 소란스러운지 모른다. 이루어야 할 꿈도, 갖고 싶은 것도, 해야 할 일도 너무 많다. 질투해야 할 것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평화로운 마음으로 별들을 바라볼 시간조차 없는데 그 소리가 들리겠는가. ‘불편한 진실’이라는 근사한 말까지 만들어내 진실에 대한 외면을 변명하려는 세상이 침묵 속에서 들려오는 별들의 노랫소리를 들을 수 있겠는가.

이제라도 삶의 본질을 향해 갔으면 좋겠다. 본질을 바라보겠다는 것은 오직 나만 옳고 우리만 옳다고 말하지 않겠다는 다짐 같은 거라고 해도 낭만적인 해석은 아닐 것이다. 문명과 멀리 떨어진 오지의 사람들이 듣는다는 별들의 노랫소리는 인간과 세계 사이에 놓여 있는 침묵의 소리인지도 모른다.

이철환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