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숙 동방사회복지회장 “남편·아들 잃을 뻔한 경험이 생명 살리는 일에 헌신케 해”

입력 2011-08-28 17:55


마흔 넷의 나이에 특수교육을 공부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단란하고 풍족했던 30대 주부의 삶이 예고도 없이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처럼. 인생의 계획표 안에 ‘특수’한 상황은 없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그는 남다른 삶의 여정을 헤쳐 왔고, 이제는 다른 사람들을 도우며 살고 있다. 김진숙(65) 동방사회복지회장의 이야기다.

김 회장은 아직도 1976년 어느 날을 떠올리면 마음이 불편하다. 35년이나 지났는데도 그 당시의 기억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지 못했다. 그해에 남편과 둘째 아들이 사흘 간격으로 큰 사고를 당했다. 그때까지 간절히 기도할 일이 없었던 그의 삶에 일순간 절박함이 찾아 들었다.

“4대째 이어져온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어요. 주일성수를 하고 가정예배도 꼬박꼬박 드렸죠. 그런데도 이따금 만족스럽게 가정생활을 하는 것이 하나님께 죄송스럽더라고요. 예수님을 제 삶의 액세서리처럼 여겼던 것 같아요. 왠지 하나님 앞에 오만한 것 같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침잠이 많았지만 오전 4시면 일어나 새벽예배를 다녔다. 금식기도도 하고, 철야예배도 드렸다. 신앙의 큰 전환점이 찾아왔고, 날로 성숙해져갔다. “남편의 병실을 지키면서 ‘내 주여 뜻대로’라는 찬송을 부르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졌어요.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라는 가사가 제 마음을 만져줬습니다. 언젠가는 제자리로 돌아갈 것이라는 희망과 믿음이 생겼죠.”

지난 24일 서울 창천동 동방사회복지회에서 만난 김 회장은 가족 이야기를 하면서도 몹시 조심스러워했다. 김 회장은 하지만 “소중한 두 사람을 잃을 뻔했던 절망적인 시절, 말씀으로 제게 들려주셨던 하나님의 음성이 삶을 변화시켰다”며 “기독교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깨닫게 됐던 일들이라 어렵게 이야기를 꺼냈다”고 말했다.

결국 김 회장이 믿는 대로 이뤄졌다. 남편은 많이 회복했고, 18일 동안 깨어나지 못했던 둘째 아들은 장교로 군대를 다녀올 정도로 건강해졌다. 그는 남편의 권유로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해 40대 중반 특수교육 전공 석·박사 학위를 땄고, 아버지인 고 김득황 박사가 세운 동방사회복지회에 몸을 담게 됐다.

김 회장은 그가 하는 일이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동방사회복지회는 입양기관으로 시작해 현재 종합사회복지기관으로 자리잡았다. 그가 특히 관심을 보이고 있는 이들은 미혼모들이다. 미혼모의 삶을 바꾸는 것, 그들의 아이들이 새 삶을 살게 되는 것은 곧 한 사람의 인생을 살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김 회장은 “오늘도 저희가 입양을 기다리며 보호하고 있는 아이들이 420명”이라며 “시설에서 단체로 길러지는 것보다 한번 버려졌던 아이들이 새 부모를 만나 사랑을 경험하길 바라기 때문에 아이들을 계속 보호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부 보조금을 타내기 위해 일부러 아이들을 많이 보호하는 것 아니냐는 일부의 비난을 받으면서도 아이들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다. 정부 보조금은 보호 아동 1인당 35만4000원에 불과한데도 무책임한 비난이 꽂힐 때가 많다.

동방사회복지회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는 성경 말씀에 기초해 세워진 단체다. 김 회장은 지난 5월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나갈 계획이다. 그는 “정책 입안자들의 마음이 메말라 있는 것이 우리나라 복지 정책의 근본적인 문제”라며 “소중한 사람들을 잃을 뻔했던 지난날을 잊지 않으며 한 생명을 살린다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돌보겠다”고 말했다.

문수정 기자 thursda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