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기독교 성지 순례] 복음·신교육 받은 학생들 항일 등불로

입력 2011-08-28 17:49


(26·끝) 군산 3·5만세운동 산실 구암교회

군산항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구암교회가 서 있다. 전북 군산시 구암동 356-8. 이곳은 한강 이남 최초의 항일만세운동(1919년 3월 5일) 발원지다. 군산시는 2008년 구암교회 성역화 사업을 펼쳐 예전 예배당을 ‘군산3·1운동기념관’으로 지정했다. 여기에는 3·1운동 당시 선조들의 항거와 일제의 탄압, 독립운동 연표가 주제와 시기별로 설명돼 있다. 당시 사용했던 태극기와 태극기를 찍어냈던 목판, 3·1독립선언서, 독립운동가 문용기 선생의 피 묻은 두루마기, 당시 독립군이 사용했던 권총과 소총 등이 전시돼 있다.

군산 선교의 역사

새 예배당은 구암교회 역사성을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성도들의 헌금을 모아 30억원 예산을 들여 창립 111년 만에 새로 지은 교회는 1544㎡(468평) 대지에 본당 건물 3층과 8층의 선교탑으로 구성돼 있다. 이 교회 김영만(49) 담임목사는 “군산 땅을 최초로 밟은 7명의 선교사와 한국인 조사 장인택을 기념해 전면에 기둥을 8개 배치했다”면서 “선교탑은 3·5만세운동의 출발점이 된 것을 기념해 35m로 했고, 선교탑 꼭대기는 선교사들이 배를 타고 성경책을 가져온 것을 기념해 배와 성경책을 펼쳐놓았다”고 설명했다.

1895년 3월, 미국 남장로선교회 선교사 드루와 전킨은 제물포에서 범선을 타고 군산에 도착했다. 이들은 동학농민운동의 여파로 한동안 정착하지 못하다 이듬해 군산으로 이주했다. 몇 달 후 여선교사 데이비스도 합류했다. 드루는 자신의 집에 진료소를 차렸다. 전킨은 순번을 기다리는 환자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이듬해 7월, 김봉래 송영도 차일선 세 사람이 학습문답을 거쳐 전킨 목사의 집에서 세례를 받았다. 전라도 최초의 세례식이었다.

1899년 전킨은 전도선이 정박하기 좋은 궁말(구암리)의 산등성이에 교회와 학교, 주택, 병원이 포함된 선교기지를 마련했다. 12월 첫 주일예배를 드림으로써 구암교회가 설립됐다. 교회 설립에는 장인택이 참여했다. 그는 1893년 1월에 열린 조선예수교장로회 선교사공의회에 남장로교 위원 레이놀즈, 전킨, 테이트와 함께 참석했던 유일한 조선인이었다.

1902년부터 군산 선교기지를 활용한 복음 전파는 매우 효율적이었다. 전킨 선교사가 서재에서 10여명의 소년소녀들을 모아 놓고 한글을 가르치던 것이 안락소학교(현 구암초등학교), 군산영명학교(제일고교), 군산멜볼딘여학교(영광여중고)로 발전했다. 다니엘 의료선교사와 최초의 간호 선교사인 케슬러는 병원 선교 사역을 활발히 진행해 구암예수병원으로 확장시켰다.

1904년 교회당의 협소함을 느낀 교인들은 공주에서 온 오인묵(군산 선교기지가 배출한 한국인 최초 의료선교사 오긍선의 부친) 장로의 헌금과 교회당 신축을 위해 전 교인의 헌금을 합한 1100냥으로 구암리 땅을 매입하고 건축을 시작해 교회 공간을 10칸으로 증축했다. 1919년에는 전 교인이 10전씩 또는 은지환, 은비녀 등을 헌금해 ‘ㄱ’자형 교회당을 신축하고 2월 봉헌예배를 드렸다.

군산 3·5만세 운동의 발원지

구암교회 교인으로 군산영명학교 졸업 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서 수학 중이던 김병수는 1919년 2월 민족 33인 중 한 명인 이갑성 애국지사로부터 독립선언문 200매를 전해 받았다. 그는 2월 28일 군산에 내려와 영명학교 은사인 박연세 장로에게 전달하고, 3500장을 더 인쇄해 구암교회 교인은 물론 지역 주민들에게 나눠주었다. 이어 태극기를 만들고 조직을 갖추어 3월 6일에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그러나 누군가의 제보로 계획이 누설돼 4일 새벽 무장 경찰관 수십명이 들이닥쳐 주모자인 박연세와 이두열을 잡아갔다.

5일 영명학교 교사 김윤실 김수영 고석주와 학생들은 석방 시위를 하기로 결의하고 군산경찰서 앞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외쳤다. 한강 이남 최초의 만세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영명학교 학생 70명 가운데 반 이상이 유치장에 갇혔다. 그러나 만세 시위는 영명학교와 구암교회 성도 등 500여명이 합세하면서 군산 전역으로 번져갔다. 3월 말 군산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입학 거부에 이어 학교에 불을 질러 일본 경찰을 놀라게 했다.

군산에서는 그해 3월에서 5월까지 총 21차례 의거가 일어났고, 2만5800명이 참여했다. 21명이 목숨을 잃었고 37명이 실종됐으며 145명이 부상했다. 이 일로 박연세와 이두열 등 10여명은 대구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했다.

군산문화원 이복웅(65) 원장은 “구암교회에서 촉발된 만세운동이 일제에 대한 주민들의 저항의식을 일깨웠다”며 “군산이 호남에 자주정신을 전파한 계기가 됐다”고 설명했다.

구암교회 성도들은 신앙 선배들의 애국정신을 잘 계승하고 있다. 지난 95년부터 교회 주도로 3·1운동을 재현하는 행사를 갖고 있다. 3년 전부터는 군산시내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교회 본당과 교육관에서 글짓기와 그리기 대회도 개최하고 있다.

군산=글·사진 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