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설교] 왜 선한 사람이 고난을 받을까?

입력 2011-08-26 17:47


시편 73편 3∼17절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만 합니까? 내가 무엇을 그렇게 잘못한 것이 있나요? 두 자녀를 잃고 절망 속에 부르짖는 여인을 본 적이 있습니다. 사람은 ‘왜’라는 질문을 마음에 담고 사는 것 같습니다.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고 당혹할 때가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선하게 살려고 애를 많이 썼습니다. 그래서 고난과 불행을 참고 견뎠습니다. 그러나 그는 도처에서 사악한 이들이 번영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찌하여 악한 자들의 길은 형통하고 의로운 자들이 고난을 받습니까?”라는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해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르고 사망 아래 떨어졌습니다(롬 5:18). 첫 사람 아담의 범죄가 인류를 고통으로 몰고 갔다는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의 법을 고의적으로 불순종했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했습니다. 이로 인해 아담 안에서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은 아담이 지은 죄를 범하지 아니했다 해도 정죄와 심판 아래 이르게 되었습니다(롬 5:14). 죄는 자신뿐 아니라 그의 후손까지 저주를 짊어지게 했습니다.

사람이 젊을 때 방탕한 나날을 보냈다면 그로 말미암은 열매는 ‘고통뿐인 미래’일 것입니다. 아담이 행복한 에덴동산에서 쫓겨 나간 것과 그 후손들이 당하는 고통은 죄 때문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임재와 그의 풍요로움, 그리고 우리 마음의 평화와 능력의 샘을 말라버리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세상에 사는 동안 고통을 당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 너희가 환란을 당하리라”(요 16:33) 이 세상은 잔잔할 때가 없는 바다와 같습니다. 우리의 대적자 마귀가 끊임없이 역사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이 때문에 실수와 어리석음 그리고 우매함이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질그릇과 같아 조금만 부주의하면 금이 가고 깨어지려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고통을 허락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고통이 우리의 인격을 형성하는 일을 맡아 하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란이 인내를 인내가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했습니다(롬 5:3∼4).

고통은 최상의 것을 사람들에게 안겨줍니다. 요셉은 그의 괴로운 세월을 통해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고 자기와 온 가족을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시편 기자는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 119:67)라고 했습니다. 고통은 그 목적에 있어 구속의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새에게 노래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새장을 어둡게 해야 한다고 합니다. 주님이 우리의 창을 어둡게 하지 아니했더라면 우리는 신령한 노래를 부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체험한 광야 40년은 위기와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려운 환경을 주시지 아니했다면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법은 어디에서 배울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고통을 당할 때 그 고통의 의미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 역사는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습니다.

잠시 악인이 형통한다 해도 어느 순간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지 모르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법을 배우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할 줄 알아야 합니다.

소나기 후에는 햇빛을 나게 하시고 수고한 후에는 쉼이 있게 하심과 같이 사랑받기 원하는 자에게 사랑해 주시고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천국을 주시고 애통하는 자에게는 위로해 주시고 온유한 자에게는 땅을 기업으로 주십니다. 또한 병든 자에게는 병을 낫게 해 주시고 외로운 자에게는 주님이 함께하십니다. 그리고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는 하나님을 보게 하십니다.

이병순 목사(의정부 천곡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