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에게 쓴 편지… 다산을 더 가까이 만나다
입력 2011-08-25 17:56
다산의 재발견 / 정민 / 휴머니스트
다산 정약용의 전남 강진 귀양살이는 1801∼1818년까지 18년간이다. 40세에서 57세에 이르는 시기였다. 개인에게는 불행이었지만 조선의 학문을 위해서는 축복의 시간이었다. 훗날 다산학단으로 일컬어지는 제자들을 양성하고 500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완성했다.
한 사람의 저술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불가사의한 성과를 남긴 다산은 그러나 정작 제자들에 대해 “양미간에 잡털이 무성하고 온몸에 뒤집어 쓴 것은 온통 쇠잔한 기운뿐”이며 발을 묶어놓은 꿩과 같아 “쪼아 먹으라고 권해도 쪼지 않고 머리를 눌러 억지로 곡식 낟알에 대주어서 주둥이와 낟알이 서로 닿게 해주어도 끝내 쪼지 못하는 자들”이라고 폄하했다.
현대인의 삶 속에서 다산학을 정립시키는 데 주력하고 있는 한양대 국문과 정민 교수는 지난 5년 동안 다산이 남긴 친필 편지를 찾아 동분서주했다. 다산의 편지가 발견됐다는 소식을 듣는 즉시 장소를 불문하고 쫓아가 원본을 살펴보고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해서 모은 편지는 150여 통에 달한다.
그의 관심사는 다산이 그렇게 폄하하던 초기 시절의 제자들을 규합해 어떻게 다산학단이라는 학술 써클을 만들었는지에 모아졌다. 그는 특히 다산이 가장 아낀 제자 황상에 주목했다. 그가 구해본 ‘다산여황상서간첩’에는 다산이 황상에게 보낸 쪽지 편지 31통과 정약전이 다산에게 보낸 편지 1통이 실려 있었다.
“네 말씨와 외모, 행동을 보니 점점 태만해져서 규방 가운데서 멋대로 놀며 빠져 지내느라 문학 공부는 어느새 까마득해지고 말았다. 이렇게 한다면 마침내 하우(下愚)의 사람이 된 뒤에야 그치게 될 것이다. 텅 비어 실지가 없으니 소견이 참으로 걱정스럽다.”(73쪽)
다산의 따끔한 나무람에 황상은 정신을 번쩍 차리고 본래 자리로 돌아왔음은 말할 것도 없다. 다산은 이렇듯 제자들에게 맞춤형 교육을 실천했다. 황상에게는 두보와 한유, 소식과 육유 등 4가를 정궤로 삼아 문로를 세우라고 주문했다. 황상은 이러한 스승의 가르침을 평생 지켜 나이 70이 넘어서도 육유의 시를 초서했다.
다산은 제자 교육에서 개성과 자질에 기초해 전공을 정해주고 전공에 따라 서로 다른 교과과정을 두어 학습시켰다. 제자 중 이청과 이강회에게는 이학(理學)을, 황상과 초의에게는 시문에 집중케 했다. 제자들에게 구체적인 학습 로드맵을 제시했던 것이다.
150여통의 친필편지는 다산문집에는 없는 것으로 편지에는 다산 개인의 성정, 편지글의 사연, 편지를 쓴 날짜 등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역사의 인과를 살필 수 있다. 이러한 편지들은 그동안 볼 수 없었거나, 보이지 않던 앞뒤를 이어주면서 이야기를 복원시키고 인과의 사연에 따라 맥락을 재구성한다.
다산이 남긴 편지는 그것이 아무리 쪼가리 글이라 해도, 무관하던 것들 사이에 네트워크를 만들어주는 한편 다산의 체취를 그대로 맡게 해준다는 점에서 다산의 새로운 면모에 접근하게 해준다. 친필 편지를 컬러로 수록해 원자료의 생생함을 느낄 수 있다.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