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신갑의 먹줄꼭지] 커피 주문과 대본

입력 2011-08-25 18:33


요즘 우후죽순처럼 자고 나면 하나씩 생기는 커피전문점에 가면 커피 한 잔을 주문하는 데 좀 시간이 걸린다. 야구장 전광판만큼 큰 메뉴를 보고, 마실 걸 골라 얘기를 하면, 주문받는 점원은 손님 쪽에서는 안 보이는 컴퓨터 화면을 보면서 서너 가지 질문을 한다.

음료에 따라 질문들이 달라지긴 하지만, 어느 가게에 가도 비슷한 순서로 비슷한 질문을 한다. 사이즈는 뭐로 할지, 차게 할지 따뜻하게 할지, 설탕으로 할지 시럽으로 할지, 마시고 갈지 가지고 갈지, 머그잔으로 할지 종이컵으로 할지, 이런 질문에 그쪽에서 묻는 순서에 따라 대답을 해야만 주문이 된다.

자동문이 열려 가게에 들어서면 갑자기 “안녕하세요? ○○○○입니다”, “××××입니다. 신선한 커피 만들겠습니다” 하는 거의 외침에 가까운 구호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카운터 너머로 손님에게 인사를 하고, 손님이 하는 말을 귀 기울여 듣는 가게들에서는 덜 그런 것 같은데, 큰 체인점일수록 이런 현상은 더한 것 같다.

‘정보’를 일정한 양식에 맞춰 주지 않으면 이해하고, 처리하지 못하는, 또는 그런 정보를 거부하는 현상은 1970년대 시골 면사무소에서나 벌어졌던 우스운 옛날이야기가 아니다.

특히 행정을 비롯한 많은 서비스가 전산화되면서 이런 추세는 오히려 더 심해진 듯하다. 컴퓨터에 그렇게 넣어야만 되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컴퓨터에 안 먹힌단다. 물론 표준화, 규격화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고, 관료제에도 나름대로 논리가 있어서 무조건 툴툴대기만 할 일은 아니다. 더구나 그렇게 해서 정말로 효율성이 높아진다면, 꼭 신자유주의 신봉자가 아니더라도 따라가야겠지 싶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어떤가?

“따르르릉∼, 따르르릉∼.”

“예, 한신갑입니다.”

“… 저… 한신갑 교수님 연구실이죠?”

일주일에 몇 번씩 반복되는 이 대화에서 귀에 걸리는 건 “…” 부분과 그 다음에 이어지는 ‘(재)확인’ 질문이다. 전화를 받자마자 전화 받는 쪽이 누구임을 밝혔는데, 잠깐의 당혹스러운 머뭇거림이 있고, 누구인지를 다시 묻는다. 초면인 사람들에게서 걸려오는 전화 대부분이 이런 식으로 시작된다.

“따르르릉∼, 따르르릉∼.”

“여보세요.”

“한신갑 교수님 연구실이죠?”

시험 삼아 내 쪽의 응답을 조금 바꾸면, 앞서의 머뭇거림이 없어지고, 전화 건 사람도 편한 것 같다. 무슨 차이일까? 후자는 통용되는 ‘대본(臺本)대로’ 진행되는 경우이고, 전자는 실질적으로는 같은 내용의 얘기지만, 조금 낯선 경우이다. 효율성으로 본다면 오히려 전자의 “예, 한신갑입니다” 쪽이 훨씬 높다. 하지만 거기에는 대본대로의 익숙함이 없다. 너무 단도직입적이다.

커피 주문은 대본에 따라 묻는 대로 대답하면 되고, 걸려오는 전화는 대본에 있는 한마디를 더하고 받으면 되는 사소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정해진 대본대로 하기의 철학’은 예상치 않은 곳에서 불쑥불쑥 모습을 드러낸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 직업인 내게 이 문제가 가장 심각하게 와 닿을 때는 과제물을 내주고, 받아 읽을 때다. 이런저런 주제로 네가 재미있게 쓸 수 있고, 내가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글을 만들어 오라고 하면, 강의실에는 긴장과 적막이 감돈다. 잠시 후 정신을 수습한 학생들이 “교수님, 질문 있어요” 하고 손을 들기 시작한다. 이 대목에서 나오는 거의 모든 질문은 과제의 내용과 형식을 규격화해 보려는 성격의 것들이다. 대본이 필요하니까.

사지선다식의 객관식 시험을 유치하다면서도, 막상 개방형 자유과제를 주면 불안해하고, 종이가 닳도록 형광펜으로 줄을 그으며 ‘공부’할 줄은 알지만, 백지를 주고 ‘생각’을 하라고 하면 허둥지둥한다. 대본을 달란다. 요즘은 내가 대본을 안 주면, 다른 데서 찾아다 쓴다. 자기 생각을 자기 방식으로 만들어 써 볼 수 있는 있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는 셈이다.

강의를 막 시작하던 무렵 학생들의 이런 불안감이 안타까워서 이건 이렇게 저건 저렇게 하는 식으로 대본을 짜 줬다가, 도대체 어느 것이 누구 건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똑같은 내용과 형식의 과제물들을 읽고 또 읽으면서,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적이 있다.

일상적이고 작은 규모이긴 하지만 이런 것들을 정해진 대본이라고 한다면, 그 대본대로 따라하지 않는 것을 일탈(逸脫)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 파격(破格)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이 일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은 대본대로 해야 한다는 강박감(强迫感)이고, 이 파격에서 깨고자 하는 것은 그 대본에 기대는 의존성(依存性)이다.

강박과 의존이 짝을 이루어 중독의 고리를 만들면, 생각과 말의 지평이 닫힌다. 좁아지는 취향과 선택의 폭만큼 다름에 대한 거부감은 늘고, 창의와 도전, 실험은 설자리를 잃는다. 대본대로 하면 되고, 또 대본대로 해야만 하니까.

대본대로 하면 안전하기는 하다. 하지만 몇 년 전 유행했던 “2%가 부족하다”는 말에서의 그 2%를 대본에서는 찾을 수 없다.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