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정의 사진] 피에르 부르디외의 중간 예술
입력 2011-08-25 18:21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사진을 ‘중간예술’이라 불렀다. 그것은 고급 예술과 민중 문화 사이에 놓여 있는 사진의 온전치 못한 예술적 지위를 가리키는 말일 수도 있고, 보통 사람이 접하기 수월한 중간 계급의 예술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는 중간예술이라는 단어를 통해 학력과 경제 수준, 거주 지역에 따라 각각 사진이 어떻게 기능하는지 분석했다. 사진이 경제, 사회, 문화적 수준과 이해관계에 따라 예술이 될 수도, 숭배의 대상이 될 수도 있음을 설명했다. 특히 그는 노동자 남성의 경우, ‘아내는 사진에 관심이 없다’는 합리화 속에서 자신의 사진 행위를 신성화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아마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의 소홀한 가정생활을 용서받고, 고급 취향을 지닌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을 높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 가족들이다. 가족들은 중간예술을 좇아 가족을 내팽개친 가장을 용서했을까. 아니면 복수를 했을까. 부르디외의 책에 이 대목은 없다. 그러나 부산 중동 고은사진미술관에서 다음 달 25일까지 열리는 ‘부산사진의 재발견’ 전의 뒷얘기를 들어보면, 우리나라 초창기 사진가들이 가정 내에서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당시 사진가들은 부르디외가 구분한 노동자 계급은 아니다. 해방 전후 혹은 1960년대까지 카메라 한 대는 집 한 채 값과 맞먹었으니 사진가는 유한계급의 상징이었다. 사진관 외에는 사진을 통한 경제 활동이 드물던 그 시절, 대다수는 다른 생업을 가진 아마추어 사진가였음에도 그들은 사진 작업을 예술로 승화시키고자 했던, 그야말로 중간예술을 꿈꾸던 이들이었다.
초창기 사진가들이 찍은 사진을 미술관으로까지 끌어내기는 쉽지 않았다. 유족들은 고인의 모든 사진을 없애거나 불태워버렸고, 고인이 가깝게 지내던 동료와의 연락도 끊어버렸기 때문이다. 일종의 복수인 셈이다. 그들은 아버지 혹은 남편이 생전에 보여준 모습에 치를 떨었다. 생업과 가족을 팽개친 채 신들린 듯이 사진만을 찍다가 물려받은 재산마저 탕진해 버린 가장이 지긋지긋했다.
미술관 측이 수소문 끝에 울산 노인병원에 입원해 있는 송봉운 선생을 찾아갔을 때, 고인은 대화가 불가능했다. 일주일 정도 기다려서야 병원을 찾아온 아들을 만났고 아들은 고민 끝에 미처 버리지 못하고 보관해 둔 유일한 필름 상자를 건넸다. 필름 한 컷씩을 습자지에 꼼꼼하게 싸놓은 그 옛날의 ‘메리야쓰’ 상자였다. 몇 컷 되지는 않지만, 사진의 완성도는 기막힐 정도였다. 아들의 얘기를 빌리자면, 어린 시절 아버지는 촬영한 필름을 현상한 뒤 오직 한 컷만을 가위로 정성스럽게 잘라낸 뒤 나머지 필름은 모두 버렸다. 그야말로 최고의 걸작만을 인정하겠다는 작가 정신을 실천했다는 것이다.
필름이 오롯이 남아 있는 드문 경우를 제외하면 이제 고인이 된 대부분의 초기 사진가의 작업은 파편적으로만 존재한다. 운이 좋게 살아남은 작품들이 뿜어내는 그 시절의 풍경은 아련하고 아름답다. 그 사진을 탄생시켰을 때 작가가 느꼈을 희열, 그리고 가족들이 느꼈을 분노. 사진은 그 사이에 있는 중간예술이다.
<사진기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