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로 엮은 ‘배정자’ 부끄러운 역사 들춰… ‘흑치마 사다코’ 펴낸 작가 은미희

입력 2011-08-24 17:57


본명이 분남인 배정자(1870∼1951)는 민씨 일파에 의해 역적으로 몰린 아버지가 처형된 뒤 일본으로 건너가 이토 히로부미의 애첩이 됐고 이후 밀정교육을 받고 귀국해 만주 일대에서 항일 독립투사를 소탕하는 데 앞장선 민족의 대표적 반역자다. 배정자를 소설화한다는 것은 그만큼 위험 부담이 높은 게 사실이다. 그렇기에 배정자 일대기를 ‘흑치마 사다코’(네오픽션)라는 제목의 소설로 펴낸 작가 은미희(51)에게 가장 먼저 묻고 싶은 것은 왜 하필 배정자인가 라는 질문이다.

“처음엔 김옥균을 쓰려고 했어요. 김옥균을 쫓아가다가 배정자를 알게 됐지요. 만약 친일파 청산만 제대로 되었더라도 나는 배정자에 관해 쓰지 않았을 겁니다. 배정자를 비롯한 친일 인사들은 광복 직후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됐지만 얼마가지 못해 슬그머니 풀려나버렸지요. 청산하지 못한 우리의 과거가 아직 우리를 짓누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상, 아프고 부끄러운 역사이지만, 제대로 알리고 싶었지요.”

소설은 분남이 관기가 돼 밀양으로 보내지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어느 날 밀양부사가 분남을 찾아온다. 그는 분남이 자신의 오랜 친구인 배기홍의 여식임을 알고 기생 노릇을 할 바에는 일본으로 가서 새로운 삶을 찾으라고 권유한다.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일본어를 익히고 생활 방식을 배운다. 그 과정에서 갑오개혁에 실패하고 자객들을 피해 일본에 머물고 있던 개화파 인물 안경수와 김옥균 등을 만나 조선에 대한 반감을 키워 간다.

“아버지는 조선을 위하다 목숨을 잃었고, 눈앞에 있는 김옥균 역시 조선을 위하다 이리 고생을 하는데, 저 또한 그 험난한 길을 따라가고 싶지 않았다. 영악하게 살 것이다. 제 삶을 위해, 내일을 위해, 걸태질로 무엇이든 여투어 둘 것이다. 그 도리질 속에 결기가 장하게 맺혔다.”(117쪽)

어느 날 김옥균은 분남을 이토 히로부미에게 데려간다. 이토는 분남의 미모에 반해 그녀에게 사다코(亭子)라는 새 이름을 지어주고 수양딸로 삼아 자신의 곁에 둔다. 이는 김옥균이 바라는 바로, 김옥균은 분남에게 이토의 정부(情婦)가 돼 중요한 정보가 있으면 비밀리에 전달해달라고 당부한다. 하지만 그녀는 김옥균의 요청에 등을 돌리는 대신 이토에게 몸과 마음을 바친다. 그녀는 권력을 사랑했던 것이다.

“사다코는 그 짜릿함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아니, 놓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것을 쥐고 싶었고, 얻고 싶었다. 정승집 개는 함부로 건드리지 못한다는데, 저 역시 정승집 개라도 되고 싶었다. 더 이상 옛날의 분남이 아니었다.”(187쪽)

이토의 지시로 밀정 교육을 받은 사다코는 조선으로 돌아와 대한제국의 기밀을 일본 정부에 전하고 독립군을 밀고하는 스파이 활동을 스스럼없이 해낸다. 이토가 안중근의 총에 맞아 사망하자 사다코는 시베리아를 떠돌며 마적단 속으로 잠입해 암약한다. 소설에 그려진 사다코의 가장 악녀다운 모습은 태평양전쟁이 터지자 일흔이 넘은 나이에 조선에서 정신대를 조직해 남양군도로 향하는 장면이다.

취재 과정에서 배정자가 정신대 조직을 주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는 은미희는 “애통하게도 현재 그분들은 억울함을 보상받지 못한 채 한 분 한 분 유명을 달리하고 계시지 않는가. 그분들의 한을 풀어드리기 위해서라도 이 사실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