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이슬 먹고 속 꽉 채운 ‘金배추’… 고랭지 배추 출하 앞둔 태백 귀네미 마을
입력 2011-08-24 22:01
강원도 태백 귀네미 마을은 땅이 하늘보다 푸르고 바다보다 거칠다. 쟁기질하던 소도 굴러 떨어질 정도로 가파른 산비탈 사이로 실핏줄 같은 농로가 등고선을 그리며 시나브로 백두대간을 오른다. 동해 해돋이와 매봉산 해넘이가 아름다운 산비탈이 초록물결로 일렁인다. 수몰민들의 눈물과 백두대간의 이슬을 먹고 자란 고랭지 배추들이다.
고랭지 배추로 유명한 태백 하사미동의 귀네미 마을로 가는 35번 국도는 낯선 풍경의 연속이다. 매봉산 풍력발전단지와 귀네미 마을 사이에 위치한 백두대간 고개는 피재로도 불리는 삼수령. 한강 낙동강 오십천의 발원지인 삼수령은 옛날에 화전민들이 나무껍질로 연명했다고 해서 피재라는 지명을 얻었다.
해바라기 밭으로 유명한 구와우를 스쳐 지나면 껍질이 눈보다 하얀 자작나무가 숲을 이룬다. 불어난 물로 빙하천을 연상하게 하는 골지천 등 모두가 해외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들. 그러나 35번 국도를 따라 좁게 펼쳐진 고랭지 배추밭은 가장 한국적인 풍경이다. 속이 꽉 찬 배추를 뽑아 트럭에 싣는 농민들의 얼굴에 땀방울이 구슬처럼 맺혀 있다.
‘배추고도’로 불리는 귀네미 마을은 35번 국도변에서 십리 쯤 떨어져 있다. 구불구불한 시멘트 포장길을 오르면 병풍처럼 둘러싼 산자락 사이로 30여 채의 한옥이 몇 가구씩 옹기종기 모여 정담을 나누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마을을 둘러싼 산은 산이 아니라 잘 가꿔진 비탈밭이다. 현기증이 일 정도로 급경사의 비탈밭에는 출하를 앞두고 나날이 몸무게를 불리는 고랭지 배추들이 촘촘한 등고선을 그리며 백두대간 마루금을 오른다.
고지대에 위치한 귀네미 마을은 본래 원시림으로 울창한 산이었다. 1985년 삼척시 하장면에 광동댐이 생기면서 광동리를 비롯해 숙암리와 조탄리 등에 흩어져 살던 37가구 주민들이 집단으로 이주하면서 마을로 변했다. 정든 고향을 댐 속에 묻은 수몰민들은 쥐꼬리만한 보상비를 받아 이곳에 마을을 만들고 산을 개간해 고랭지 배추밭을 조성한 것이다.
“어린 6남매와 먹고 살 일이 막막했지. 보상비 받아 집 짓고 산비탈 개간하고 나니 남는 게 없었어. 처음 5∼6년은 토질이 좋지 않아 배추농사도 망쳤어. 한 해 잘되면 그 다음 해엔 배추 값이 폭락해 갈아엎기 일쑤였지. 하지만 배추농사로 아이들 공부시키고 출가까지 시켰으니 고마운 땅이지.”
40대 초반에 귀네미골로 이주해 몇 년 전까지 배추농사를 지었다는 변동천(73)씨는 귀네미 마을의 살아있는 역사. 처음에 37가구가 귀네미 마을에 터전을 잡았으나 모두 떠나고 지금은 25가구가 축구장 150개 크기의 배추밭(33만평)에서 250만 포기의 배추를 경작하고 있다.
귀네미 마을이 위치한 귀네미골은 본래 삼척 땅이었으나 1990년대 중반의 도농통합 때 생활권이 가까운 태백시로 편입됐다. 마을이 삼척 신기면 환선동굴 위에 자리 잡아 운전자들이 내비게이션에 ‘환선동굴’을 입력하면 귀네미 마을로 안내하는 경우도 허다한 첩첩산골이다. 귀네미는 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의 형세가 소의 귀를 닮아 우이령(牛耳嶺)이라고 부른 데서 연유했다.
태백 매봉산, 강릉 안반덕, 평창 육백마지기와 더불어 우리나라 4대 고랭지 배추밭으로 꼽히는 귀네미 마을의 정상은 태백시와 삼척시 경계에 솟은 삿갓봉(1185m)으로 해돋이 명소. 정상에 서면 덕항산 매봉산 푯대봉 가덕산 등 중중첩첩 이어지는 백두대간 줄기가 한눈에 들어온다. 아침햇살에 황금색으로 물드는 배추는 금추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황홀하다.
귀네미 마을은 여느 마을과 달리 창고를 제외하고는 모든 건물이 한옥이다. 이주 당시 정부에서 한옥에만 보조금을 지급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사방이 산에 둘러싸여 있지만 배추밭 사이로 옹기종기 모여 앉은 한옥의 유려한 지붕 선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비탈밭과 어우러져 포근한 느낌을 갖게 한다.
해발 900∼1100m에 위치한 귀네미 마을은 해양성 기류가 교차하는 지점이라 일교차가 크다. 한여름에도 긴 소매 옷을 입어야 할 만큼 서늘해 이곳에서 생산된 고랭지 배추는 수분이 적고 당도가 높아 씹는 맛이 아삭아삭하다. 그러나 날씨가 춥다 보니 여느 지역과 달리 1모작밖에 할 수 없는 게 단점.
5월 말에 파종한 배추밭은 본격적인 출하를 앞둔 8월 하순이 가장 아름답다. 이맘때면 전국에서 몰려드는 사진작가들로 귀네미 마을은 축제 분위기를 연출한다. 속이 꽉 차기 시작한 배추가 푸른 융단을 펼쳐놓은 듯 푸른 파도가 물결치는 듯 촘촘한 등고선을 그리는 모습은 한 폭의 풍경화. 보는 위치에 따라 배추밭이 전혀 다른 풍경화를 그리는 것도 귀네미 마을로 사진작가들이 몰려들게 하는 매력이다.
귀네미 마을이 여느 고랭지 배추단지와 다른 점은 배추밭을 개간한 1세대와 2세대들이 마을을 이룬 채 경작을 하는 삶의 터전이라는 것. 매봉산과 안반덕의 경우 개간 당시와 달리 1∼2가구만 살고 나머지는 출퇴근을 하면서 기업식으로 경작을 해 사람 사는 맛은 귀네미 마을만 못하다.
느림의 미학이 빚은 귀네미 마을의 배추밭에서 맛보는 포근함은 오랜 세월을 흙과 함께 살아온 수몰민들의 눈물과 땀, 그리고 정(情)이 배추김치처럼 한데 버무려졌기 때문이 아닐까.
태백=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