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은미희의 마실] 나는 ‘나이롱 신자’였다

입력 2011-08-24 19:18


나는 얼마 전까지 가짜 신자였다. 한마디로 ‘나이롱 신자’였던 것이다. 처음 나는 내 자발적 의지와는 상관없이 교회에 나갔다. 어릴 적에 부모님이 이끄는 대로 따라간 것이 내가 교회에 첫발을 내딛게 된 계기였다. 그때 초등학교에도 다니지 않았었으니 아마 대여섯살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목사님의 설교가 기억에 남을 리 없다.

그렇게 나는 부모님을 따라 교회에 나갔고 나중에 부모님의 강압에 의해 혼자 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든 게 건성이었다. 이후 중학생이 되었을 때 나는 심각한 아노미 현상에 빠져들었다. 모든 것과 충돌했고, 모든 것이 마뜩찮았다. 그 안에는 종교 문제도 포함돼 있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전 타의에 의해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으니 당연히 내 반항의 틀 안에는 신앙 문제 또한 들어 있었다. 주일만 되면 나는 어떻게든 교회에 가지 않으려고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빼먹었다.

나의 방황은 참으로 깊고도 질겼다. 그 시절 나는 스스로 ‘왕따’가 되었다. ‘데미안’과 ‘신곡’, 지금으로 치자면 19세 이하는 읽어선 안 될 책들을 읽으며 나만의 세상에 깊이 빠져들었다. 나와 세상의 간극은 참으로 넓었고 그 괴리에 마음 다치며 그렇게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때 나는 세례를 받을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받지 않겠다며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귀동냥해 듣거나 대충 읽은 과학책에서 얻은 얄팍한 지식들은 목사님의 설교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나는 끊임없이 성경에 대해 의문을 품었고, 그 의문과 따분함들은 자연적으로 나를 교회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그렇게 나는 제멋대로인 아이로 성장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교회와 관련한 여러 가지 부정적인 인식과 사건들은 더더욱 나를 하나님과 교회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다, 내 주변에는 직접적으로 교회와 하나님을 공격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그때 어땠던가. 그저 곤혹스러운 마음을 숨긴 채 내가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숨기고만 있었다. 교우들은 그런 나를 붙잡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지만 그럴수록 나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를 의심하며 교회로부터 도망쳤다. 알량하게나마 무언가 세상것을 얻었을 때는 내 재주와 실력 덕분이라며 자만과 교만에 빠져서는 우쭐해했다. 그렇게 룰루랄라 세월을 보냈다. 헌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양을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으신다고 했던가.

어느 날 나에게 커다란 시련이 찾아왔다. 시련들은 참으로 혹독했고, 답이 없었다. 오로지 기도하고 매달릴 수밖에는 해결책이 없었다. 나는 기도하고,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이 세상에는 어떠한 이론과 논리로도 설명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 과학적 수치로 증명할 수 없거나 불가능한 일이 현실로 나타나기도 한다. 우리는 그것을 기적이라고 부르거나 혹은 우연이라고도 한다. 나 역시 그것들을 경험했다. 그것도 여러 번! 놀랍지 않은가. 그러니 나는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나를 붙잡은 건 그 누구도 아닌, 하나님이셨다.

내가 아는 한 목사님이 계신다. 양복실 목사님이 그분인데, 목회 활동을 하다 큰 시련을 겪으셨다. 하지만 목사님은 주저앉지 않고 죽을힘을 다해 기도에 매달렸고, 지금 와서는 오히려 그 시련을 감사하게 여기신다고까지 했다. 다른 일에 당신을 쓰시기 위해 하나님이 그 시련을 주신 것이라며 담담하게 말씀하신다. 그 시련을 하나님의 뜻으로 기쁘게 받아들이니 어찌 매사가 감사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 또한 하나님을 아는 데 참으로 많은 시간이 걸렸다. 나의 우둔함과 아집과 오만과 교만이 빚어낸 방황의 시간이었지만 어쨌거나 지금이라도 하나님을 알고, 기도의 힘을 알아서 다행이지 않은가. 지금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무얼 두려워하는가? 하나님이 계시는데. 기도라는 소중한 무기가 있는데. 그러니 기도하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라고 위로하고 싶다.

■ 은미희

1999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고 2001년 ‘비둘기집 사람들’로 삼성문학상을 받았다. ‘소수의 사랑’ ‘바람의 노래’ ‘나비야 나비야’ 등 다수. 광주(光州)순복음교회를 섬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