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이 축복되다… 희귀 소아암 이겨낸 부자 박송주 목사와 준하군
입력 2011-08-24 18:17
“아빠! 나는 왜 나일까? 세상에는 사람들이 참 많이 살고 있잖아. 그런데 나는 왜 준하지? 그리고 나는 왜 아빠 아들일까? 내가 아빠 아들이고 내가 여기 살고 있는 게 참 신기하다. 그렇지, 아빠?”
“그럼….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계획해 주셨고, 아빠에게 준하를 선물로 주신 거야.”
“아빠, 그러고 보면 내가 아팠던 것도 꽤 괜찮았던 것 같아. 이렇게 매일 아빠랑 운동하러 다니고 이야기하고 말이야.”
준하(11)는 아빠 박송주(41·여주 광현교회) 목사와 함께하는 지금이 정말 행복하단다. 최근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준하네 집을 찾았다. 가족들의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는 이유가 궁금했다.
마른하늘 날벼락
2005년 4월 마지막 주, 박 목사는 벨기에 브뤼셀 신학교(Continental Theological Seminary in Belgium)에서 신학 석사과정 마지막 수업을 남겨 놓고 있었다. 기숙사 전화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수화기 너머로 울먹이는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학 생활하는 지난 2년 동안 한 번도 집에 서 먼저 전화를 걸어 온 적이 없었기에 순간 긴장했다.
“여보, 준하 배에 혹이 생겼어…. 조금 더 검사를 해봐야 악성인지 아닌지 안대. 아마 ‘암’일 가능성이 많대. 검사 결과 나오는데 일주일 걸린대.”
다시 통화하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가슴이 먹먹했다. 여태껏 살아오면서 그에게 일어나리라곤 꿈에서조차 생각지 못한 기가 막힌 일이었다.
‘나 혼자 유학 오는 게 아니었어. 별일 없을 거야. 하나님께서 지켜주실 거야. 하나님, 도와주세요.’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입에서는 기도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결과를 기다리는 일주일이 수년은 되는 것처럼 힘들고 괴로웠다. 서둘러 귀국길에 올랐다.
희귀 소아암
할머니는 다섯 살 난 손자 준하를 목욕시키다 배에 불룩한 것이 있어 바로 준하를 데리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큰 병원으로 옮기라고 했다. 결국 삼성서울병원에서 암 판정을 받았다. 병명은 희귀 소아암인 ‘횡문근육종’.
박 목사는 귀국하자마자 병원으로 향했다. 머리 깎은 아들 모습을 보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주위에서 항암치료 받는 사람들을 많이 봐서 힘들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치료를 아들이 받는 것을 보니 그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준하의 뱃속에는 앞부터 등허리 쪽으로 12㎝의 혹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의사는 절제 수술을 하기 전에 먼저 혹 크기를 줄여야 한다고 했다. 1차 항암치료를 받았다. 항암치료는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항암치료는 암세포뿐만 아니라 정상적인 세포도 함께 죽이기 때문에 보통 건강한 성인들도 견디기 힘든 과정이다.
다섯 가지 주사를 맞는데 주사마다 다양한 부작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이런 부작용을 중화시키는 약도 많이 먹어야 했다. 준하는 하루 종일 약과 씨름을 해야 했다. 준하는 주로 복통이 심했다. 배의 혹을 줄여야 했기 때문이다. 엄마 김긍영(38)씨는 밤새도록 배를 쓸어주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악몽 같은 6개월간의 1차 치료가 끝난 후 혹은 3㎝로 줄어 있었다. 혹 제거 수술을 했다. 3시간이면 된다고 했다. 그러나 수술은 3시간을 훌쩍 넘겨 7시간 만에야 끝났다. 종양을 제거한 후 그 주위에 있는 혈관이 좋지 않아 새 혈관으로 이어주는 수술까지 병행하느라 더욱 힘든 수술이 되었다.
준하의 회복을 위해
2년6개월의 항암치료가 끝났다. 암환자는 항암치료와 수술로 다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회복하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재발을 막기 위해서는 면역력을 높여야 했다.
박씨는 이때까지는 담임목사의 배려로 경기 용인시 예수마을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사역했으나 이제는 준하의 회복에 집중해야 했다. 삶의 터전이었던 용인은 급성장한 도시라 암환자에게는 좋지 않은 환경이었다. 주변 지역을 꼼꼼히 따져 본 끝에 경기도 여주군으로 이사하기로 했다. 문만 나서면 강변공원이 있어 이사 첫날부터 걷기운동을 시작했다. 여주종합운동장에서 탁구도 했다. 탁구를 하면서 건강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결국 지난해 완치 판정을 받았고 이제는 약도 모두 끊었다.
박 목사는 집에 혼자 남겨진 딸을 위해 병원과 집을 오갔으나 병원수발을 전담한 아내는 몸 여기저기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좁은 병원 침대에서 매일 옆으로 누워 자다보니 골반이 뒤틀려 허리병이 생겼다. 아내는 지금도 계속 치료받고 있다.
준하가 아팠을 때 누구보다 큰 짐을 졌던 것은 두 살 위인 누나 인하였다. 동생이 발병했을 당시 초등학교 1학년에 불과했지만 어른스럽게 행동했다. ‘포기’도 배웠다.
“모든 사람의 관심이 준하에게 집중돼 저는 투명인간 같아 힘들고 외로웠어요.”
이런 어려운 상황을 거치면서 준하네 가족은 결국 승리했다.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친가, 외가, 동역자, 성도 등 많은 사람들이 준하의 소아암을 함께 짊어져 줌으로써 암을 이겨낼 수 있었다.
아빠의 치유
치료가 끝난 시점은 곧 2학년이 될 나이였다. 또래보다 신장, 체력이 뒤지고 외모(민머리)를 극복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 준하는 초등학교를 다니지 않기로 결정했다.
아빠가 준하 교육을 맡았다. 영어와 논술을 가르쳤다. 준하에게 친구를 만들어주기 위해 아이들을 불러 함께 가르치다보니 공부방이 만들어졌다.
틈틈이 인터넷 카페나 블로그에 준하 이야기를 올렸다. 나중에라도 준하가 어떤 상황이었고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준하를 위해 함께 어려움을 짊어졌는지를 알리고자 글들을 모아 책을 냈다. 투병 중 머리카락이 없는 준하와 아빠가 함께 찍은 블로그의 사진을 보고 올린 친구의 농담 같은 댓글이 제목이 됐다. ‘아빠는 목사! 아들은 동자승?’(넥서스CROSS 출간)
책을 쓰면서 박 목사는 자신이 치유됨을 느꼈다. 자신의 경험을 통해 다른 사람의 아픔을 함께 짊어지게 되고 그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하고 싶은 목회를 접어야 해 때론 하나님을 원망하고 분노도 했지만 이제는 내면이 평안해졌다.
“준하 하나 보고 했는데 하나님이 그것도 목회라고 생각하셨으면 목회라는 깨달음을 얻었어요. 올 1년 홈스쿨링을 하기로 한 딸과 함께 공부방에 오는 아이들에게 좋은 가치관을 심어주고 부모들에게 좋은 교육을 보여주면 이것도 하나의 목회임이 분명하지요.”
아들의 소아암이라는 긴 터널을 지나왔지만 이를 통해 하나님의 더 많은 사랑과 축복을 경험할 수 있어 감사하다고 그는 말했다.
여주=글 최영경 기자·사진 윤여홍 선임기자 ykcho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