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조미자] 그리움에 소인을 찍어

입력 2011-08-23 17:50


아침 일찍 우체국에 들렀다. 손님 한 사람이 소포를 포장하고 있었다. 테이프가 끼여 있는 기계를 보며 어떻게 사용하는 거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하던 일을 멈추고 테이프 끝을 빼내주면서 친절하게 알려준다. 하얀 편지 봉투에 검은 펜으로 눌러 쓴 글씨. 저런 편지 겉봉을 언제 보았던가. 흰 눈밭에 검은 새 발자국이 점점이 찍힌 것 같은 신선함이다. 정성껏 소포 포장을 하는 손들을 보니 다사로움이 느껴진다. 받는 손이 아니라 보내는 손들이다. 보내는 기쁨들이다.

나는 초임 발령을 산골로 받았다. 보이는 것은 둥그렇게 분지를 에워싼 산과 하늘뿐이었다. 오후 서너 시쯤 되면 멀리 강변의 포플러 숲 사이를 달려올 빨간 자전거를 기다렸다. 우체부를 맞기 위해서이다. 그때 함께 졸업한 동기는 내 편지의 답장에 메아리 소년을 띄워 보냈다. 산골 마을의 소년이 메아리와 사귀는 내용이다. 소년이 ‘난 너를 사랑해’라고 외치자, 메아리도 ‘난 너를 사랑해’라는 여운을 남긴다. 그 시절 나도 편지를 기다리며 ‘난 혼자야. 누가 친구가 되어줄래’ 하고 수신을 보냈던 것 같다.

이듬해 겨울 눈이 날리던 날, 한때 알고 지내다 사소한 오해로 소식이 끊긴 남자가 산골 근무지를 찾아왔다. 그를 사택으로 안내하며 마을 사람의 이목이 있으니까 밖으로 나서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방에 갇힌 그는 내가 사람들과 주고받은 편지를 보게 되었다. 퇴근 후 그는 볼 부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편지를 즐겨 쓰는 습관이 그와의 이별을 그토록 허망하게 맞게 할 줄 몰랐다.

가끔 우체국에서 어쭙잖은 나의 글이 들어 있는 책을 발송할 때가 있다. 책을 부치고 나올 때면 허전함이 밀려왔다. 내 사유(思惟)의 곳간이 비었으니 또 무엇을 잉태해야 할 것인가. 앞으로 다가올 산고(産苦)를 미리 겁냈다. 그날 우체국 앞의 베고니아 붉은 꽃잎이 하나 둘 흩날려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나를 떠나보내며 참아내던 어머니의 충혈된 눈자위와 닮아 있었다. 내가 부친 소포가 제대로 닿을지 하는 염려와 받을 사람에게 짐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딸을 떠나보내는 어머니의 심경과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눈 온 아침 우체국에 가면 내 발자국은 첫 발자국이 되어 따라온다. 그 위에 눈이 쌓이거나, 다른 사람의 발자국이 겹치면 내 발자국은 지워진다. 그렇다고 내가 걸어온 삶의 여정을 처음으로 되돌릴 수는 없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 삶의 궤적을 돌아본다. 산골의 고적감을 달래주던 동기(同期)도 만나고 싶고, 편지 다발에 등을 보이며 멀어져 간 사람도 용서해본다. 너그러운 관용도, 순한 귀를 열어놓는 법도 우체국에서 배웠다. 알지 못했던 사람과의 만남보다 이제껏 맺은 인연을 더욱 귀히 여길 줄도 알게 되었다.

나는 오늘도 우표 대신 그리움에 소인을 찍어 소포를 보냈다. 원추리 주홍 꽃잎 편에, 가을이 오는 바람 편에 정을 실어 보냈다. 우체국 창 너머 운중천의 물소리가 내 목소리를 전해주려는지. 내가 적은 글귀들이 물살에 섞여 웅웅 소리를 낸다.

조미자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