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말 걸기-김나래] 한나라당의 팀 스피리트

입력 2011-08-23 17:45


딸을 데리고 뒤늦게 미국으로 공부하러 갔던 여자 선배가 이달 초 잠시 한국에 들어왔다. 격려차 평소 알고 지내던 여러 분야의 사람이 모인 자리. 한 여교수는 “학문 탐구의 환희를 만끽하고, 무엇보다 그들의 ‘팀 스피리트’를 꼭 배워오라”고 당부했다. 17대 국회의원을 지냈던 그는 과거 정치판에서의 경험을 풀어놓으며 “여의도만큼 팀 스피리트가 발휘되지 않는 곳도 없다”고 했다.

‘팀 스피리트(Team Spirit)’. 누군가는 1976년부터 시작돼 94년 중단된 한·미 양국군의 연합군사훈련 작전명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이 단어는 말 그대로 공동체 정신을 뜻한다. 그 교수의 말은 한 마디로 다른 사람들과 역할 분담 잘 하고, 서로 존중하고 협력하며 일하는 법을 배워 오란 것이었다.

이 단어를 다시 떠올린 건 한나라당이 무상급식 주민투표에 임하는 모습을 보면서다. 지난 21일 주민투표 결과에 시장직을 걸겠다고 한 오세훈 시장은 결정에 앞서 자신을 말리는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에게 섭섭함을 감추지 않았다. 민주당의 적극적인 공세에 비하면 한나라당과 서울 지역 국회의원들은 일사불란하게 대응해주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반대로 그날 오 시장의 기자회견 직후 서울지역 의원들은 하나같이 분을 참지 못했다. 한 초선 의원은 “내가 매일 아침 6시부터 지하철역에 나가서 투표하자고 얘기하던 사람인데, 정말 배신당한 느낌이다. 기자회견을 할 것이란 얘기가 나오길래 아침 8시에 전화를 6통이나 했는데 한 번도 안 받더라. 주민투표를 시작할 때도 그러더니 이번에도 서울 지역 의원들에게 상의 한마디 없었다. 정말 서운하다”고 했다.

이에 앞서 주민투표가 확정될 무렵, 또 다른 서울 지역 의원이 사석에서 털어놓은 이야기를 들어보자. “오 시장에게 왜 우리한테 한마디 상의도 없이 결정했냐고 물었더니 ‘어차피 반대할 거 아니었느냐’고 하더라. 반대할 텐데 상의할 필요가 뭐가 있느냐는 얘기였다. 오 시장은 자기한테 유리하다고 생각하면 다른 사람이 아무리 뭐라고 말해도 듣지 않는다.” 한마디로 자기 혼자 살겠다고 당을 수렁으로 내몰았다는 것이다.

오 시장이나 의원들이나 과연 한나라당이라는 한 배에 탔다는 공동체 의식이 있나 싶다. 울며 겨자 먹기로 일단 주민투표에 총력을 기울이자고 했으니 일정 부분 없진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정말 한나라당에 팀 스피리트가 살아있었다면 오 시장이나 당 지도부, 의원들이 지금처럼 행동했을까.

비단 무상급식 이슈만이 아니다. 내년 4월 총선이 코앞에 다가오면서 의원들 저마다 살 길을 찾는다곤 하지만 당내에선 “이번엔 좀 심하다”는 말을 대 놓고 한다. 지난 몇 년간 행정부에 갔다가 최근 당으로 돌아온 한 당직자는 “지금 한나라당이 당인가? 당은 사라지고 의원들 개별 플레이밖에 없는데”라며 혀를 찼다.

왜 그럴까. 영남권의 한 초선 의원은 이런 한나라당의 모습을 이렇게 설명했다. “한나라당을 보면 법조계, 학계 등 각 분야의 명망가들이 모여서 그중에 누가 제일 잘났나 경쟁하는 곳 같다. 한 사람이 다 잘할 수는 없는 건데, 각자가 잘하는 걸 하면서 다른 사람의 장점을 인정하고 다 같이 가기보다는 자기가 제일 앞서 갈 수 있는지만 신경 쓴다. 누가 좀 뜬다 싶으면 배 아파하고 깎아내리기에 여념이 없다.” 내 옆 사람이 잘 나간다고, 그 사람이 행복하다고 해서 내가 불행해지는 건 아닐 텐데. 도대체 왜 그런 건지, 권력의 속성인지 뭔지 모를 일이다.

어쨌든 이제 몇 시간 후면 주민투표 결과가 나온다. 선관위는 24일 저녁 8시반쯤이면 투표율 집계가 끝날 거라고 했다. 투표율 결과는 1차적으로 오 시장의 정치적 승부수에 대한 성적표로 해석될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는 한나라당 팀 플레이 결과에 대한 성적표이기도 하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 그 결과를 받아든 한나라당은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정말 궁금하다.

김나래 정치부 기자 nar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