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출판] 이 시대의 영적 스승 뉴비긴 “세상 제대로 이해하려면 십자가를 좇아라”
입력 2011-08-23 21:27
아직 끝나지 않은 길/레슬리 뉴비긴 지음/복있는 사람
죽으면 대부분 잊혀진다. 그러나 죽은 이후에 더욱 빛을 발하는 사람이 있다. 전 생애가 수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아니 단순한 영향이 아니라 유익과 축복을 주는 사람은 반드시 연구되어야 한다. 레슬리 뉴비긴(1909∼1998). 한국교회 내에서 어떤 이는 “잘 안다”며 흥분할지 모르지만 일반 대중들은 “뉴 비긴이라고? 누군데?”라고 할 인물이다. 지금 알건 모르건, 그는 반드시 한국교회에 ‘널리 알려져야 할 인물’이다.
영국출신의 성공회 주교로 35년간 인도 선교사를 지낸 뉴비긴은 단순한 선교사를 넘어 수많은 신학자와 선교학자, 기독교 사상가에게 영향을 미친 이 시대의 영적 스승이다. 뉴비긴 평전을 쓴 제프리 웨인 라이트는 그를 확신있는 신자, 담대한 전도자, 에큐메니컬 운동의 주창자, 목회적 주교, 선교 전략가, 종교간 대담가, 사회 개혁가, 예전적 설교가, 영적 교사, 기독교 변증가라고 말했다. 참으로 스펙트럼이 넓은 인물이다.
그는 대부분의 삶을 선교사와 세계교회협의회(WCC)에서의 활동으로 보냈다. 복음주의자들의 눈에는 WCC에서 부총무 등 다양한 직책을 맡은 그가 자유주의자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자유주의자는 물론 복음주의자, 은사주의자들과도 깊은 교류를 한 사람이었다. 주된 활동은 자유주의 진영에서 했지만 복음주의자들에게 더 많은 영향력을 미쳤다. 가톨릭 세계에서도 그를 주목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자유주의 진영에 몸담았으나 어떤 복음주의자들보다 더 복음적이었고 학구적이었으나 현장을 결코 외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 시대에 깊은 영향을 주는 많은 저서들을 남겼다. ‘교회란 무엇인가’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서구 기독교의 위기’ ‘죄와 구원’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요한복음 강해’ 등. 반드시 읽어야 할 책들이다. 그러나 이 책들을 읽기 전에 먼저 보아야 할 책이 있다. 그의 자서전인 ‘아직 끝나지 않은 길’(Unfinished Agenda·복있는 사람)이다. 뉴비긴을 알고 싶으면 이 자서전을 읽으면 된다. 그의 삶과 신앙, 신학과 선교, 일관된 정신이 담겨 있다. 책 도입부의 뉴비긴에 정통한 변진석 한국선교훈련원 원장의 ‘해설의 글’은 아주 유익하다.
이 자서전을 읽으면 “왜 지금 뉴비긴인가?”라는 질문의 답을 자연스레 찾을 수 있다. 색인을 포함해 547쪽의 책을 정독한 뒤 뉴비긴은 참으로 우리가 직면한 많은 문제에 답을 줄 수 있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WCC 총회 개최 문제로 진통을 겪고 있는 한국교회는 뉴비긴을 통해 화합의 길을 모색할 수 있다. 다원화 사회 속에서 종교간 갈등이 첨예화된 작금의 한국 현실에도 그의 삶과 글은 도움이 된다. 특히 복음의 축소, 왜곡을 넘어 복음에 대한 차가운 멸시가 만연된 한국에서 어떤 복음주의자들보다도 복음의 능력을 강조한 뉴비긴의 일생은 새로운 도전을 주기에 충분하다.
책을 읽다보면 독자들이 처한 현실에 따라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선교사들은 이 ‘선교사의 선교사’로부터 무엇이 참된 선교인지를 배우게 된다.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은 한 지도자를 형성하게 만든 수많은 요인들을 배울 수 있다. 책에는 라인홀드 니버, 칼 바르트, 에밀 부루너, 핸드릭 크레머, 존 모트, 잭 윈슬로우, 윌리엄 템플 등 그와 교유했던 수많은 신학적·선교적·영적 거인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뉴비긴이 읽었던 많은 책들의 리스트도 주의해 보아야 한다. 청년들은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인생이 되기 위해선 인생의 황금기를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알게 된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선 치열한 고뇌, 그리고 강렬한 영적 체험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흔히들 자유주의자와 영적 체험은 무관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WCC 무대에서 활동한 그는 강력한 체험의 신앙을 지녔다. 그 체험이야말로 일생 그를 한길 가는 선교사로 만든 동인이었다. 케임브리지대학 퀸즈칼리지에 다니던 젊은 뉴비긴은 십자가의 환상을 보았다. “하늘과 땅 사이의 공간에, 이상과 현실 사이에 걸쳐 있는 십자가와 온 세계를 끌어안고 있는 팔이 보이는 그런 환상이었다. 예전에 한번도 본 적이 없었던 그날 밤의 환상이 계기가 되어 나는 이 세상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십자가를 좇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순간부터 나는 길을 잃을 때 어떻게 내 위치를 찾아야 할지를 알게 되었다.”
‘이 세상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십자가를 좇아야 한다’는 이 한마디만 확실히 기억하더라도 책을 든 보람이 있으리라. 인생의 말년에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 나는 인생의 출발점, 그 십자가의 환상으로 돌아갑니다. 나는 아직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든 인류 문화사에서의 유일한 장소, 곧 죄와 용서, 속박과 자유, 갈등과 평화, 죽음과 삶 같은 궁극적인 신비들을 다루는 결정적인 장소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바로 그 십자가로부터 나의 위치를 확인하고 그 불빛을 받아 발걸음을 내디딜 수 있음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책은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는 히브리서 3장14절 말씀으로 시작된다. 뉴비긴이 끝까지 잡고 있었던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복음의 절대 명령인 연합에의 부름이었다. 그는 고백한다. “내가 숨을 쉬고 있는 한, 나는 하나님의 교회가 ‘외향적이고 가시적이며 하나 된 사회’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계속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뉴비긴은 참으로 ‘행복한 선교사’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 속의 여러 장 사진들, 각종 WCC 총회와 위대한 신학자들과 함께 한 모습 등은 그가 현대 교회사에서 얼마나 중요한 인물이었는지 말해 준다. 그러나 그 사진들보다 더욱 감동적인 것은 528쪽에 있는 아내 헬렌과 함께 찍은 노년의 뉴비긴의 모습이다. 한 길을 향해 치우치지 않은 걸음을 걸었던 그가 ‘아름다운 가정에 대한 풍성한 추억을 지닌 행복한 선교사’(변진석 원장 평)였다는 사실을 그 다정한 노부부의 사진 한 장은 말해 준다.
이 자서전은 독자들로 하여금 지나온 인생에 대한 후회감을 갖게 할 수 있다. ‘저 나이쯤엔 나도 저렇게 해야 하는데…. 인생을 저렇게 살았어야 하는데….’ 그러나 후회할 필요는 없다. 뉴비긴은 일선 선교사를 은퇴한 70대 이후에도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그의 자서전 제목 ‘아직 끝나지 않은 길’은 어떤 사람의 인생도 “이제 끝났다”고 선언될 수 없으며 새로운 시작의 기회, 십자가를 향하는 길은 언제나 열려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다소 어려운 내용이지만 자녀를 사랑한다면 이 책을 선물해 주기 바란다. 선교사들과 목회자, 성도들은 물론이고.
이태형 선임기자 t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