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이광형] 사극에 역사가 없다
입력 2011-08-22 17:29
안방극장에 사극 바람이 불고 있다. 현재 지상파 TV에서 방송 중인 역사 드라마는 고구려 최전성기인 광개토대왕 시대를 그린 ‘광개토태왕’(KBS 1·토일), 조선시대 수양대군(세조)의 딸과 좌의정 김종서의 아들 사이 애틋한 사랑을 담은 ‘공주의 남자’(KBS 2·수목), 백제 황산벌 전투의 계백 장군 이야기를 다룬 ‘계백’(MBC·월화), 조선 최고의 권법서인 ‘무예도보통지’를 엮은 백동수의 활약상을 그린 ‘무사 백동수’(SBS·월화) 등 4편이다.
4편 모두 주인공의 출생에 얽힌 비화를 시작으로 주변 인물들의 모함과 배신, 화려한 액션, 대규모 전투 장면 등으로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광개토태왕’은 고구려와 중국 연나라 및 말갈족의 싸움이 연일 전개되고, ‘계백’은 백제 마지막 임금인 의자왕과 계백의 힘겨웠던 어린 시절 사연이 눈길을 끈다. ‘무사 백동수’와 ‘공주의 남자’는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에서 아슬아슬하게 목숨을 이어가는 주인공이 손에 땀을 쥐게 한다.
하지만 지나치게 허구적이다. 드라마는 작가의 상상력이 빚어낸 픽션이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관계는 중요하지 않다고 할지 모르겠으나 실제 인물에 대한 묘사는 어느 정도 근거가 필요하다. ‘광개토태왕’이나 ‘계백’의 경우 주인공의 혁혁한 활동이 ‘삼국사기’ 등에 대략적으로 나와 있으나 개인사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어 드라마 작가나 연출가가 임의대로 할 수밖에 없는 한계는 있다. 그러나 ‘무사 백동수’와 ‘공주의 남자’는 사정이 다르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두 드라마의 등장인물에 대한 자료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고 또한 우리가 익히 아는 사람들이다. ‘무사 백동수’에는 최근 사도세자가 죽는 장면이 방송됐다. ‘조선왕조실록’도 그렇고 우리가 국사 교과서를 통해 배운 내용도 그렇듯이 사도세자는 사색당파의 소용돌이 속에서 온갖 기행을 저지르다 아버지인 영조의 미움을 받아 뒤주에 갇혀 숨진 비운의 주인공이다. 드라마는 이 대목을 약간 비틀었다. 북벌을 꿈꾸는 사도세자는 음해 세력들의 간언으로 뒤주에 갇힌다. 그러자 세자의 측근들이 백동수의 죽마고우인 양초립을 뒤주에 대신 가두고 세자는 탈출시킨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적들을 만나 장렬하게 맞서다 결국 죽게 된다. 세자의 시신은 다시 뒤주에 두고 양초립은 풀려난다. 세자의 죽음을 극적으로 반전시키기 위한 장치라고 이해되지만 실제 인물의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이렇게 바꿔도 되는지 모르겠다.
‘공주의 남자’는 수양대군의 딸 세령과 김종서의 아들 승유가 실제 인물이냐를 두고 논란이다. 수양의 딸은 원래 2명이었으나 큰딸(본명 이세희·극중 세령)은 아버지의 왕위 찬탈에 항의하다 궁궐 밖으로 쫓겨나 평생을 평민으로 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김종서의 아들은 승규 승벽 승유 등 3명으로 수양이 정적(政敵)들을 제거한 계유정란(1453년) 때 아버지와 함께 모두 철퇴를 맞아 죽은 것으로 기록됐다.
다만 김종서의 손자, 즉 승벽의 아들이 우여곡절 끝에 살아남아 평민이 된 세조의 큰딸과 훗날 백년가약을 맺어 아들을 낳은 것으로 순천김씨 족보 등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이 내용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분명한 것은 수양의 큰딸과 김종서의 셋째아들 승유의 인연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드라마는 두 남녀의 애절한 사랑이 실제 이야기인 것처럼 역사적 사건과 인물들을 뒷받침하며 그럴 듯하게 포장하고 있다.
시청률을 금과옥조로 삼는 드라마의 속성상 재미를 추구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해가 간다. 그러나 문제는 시청자들이 드라마의 허구를 실제 사실로 인식할 여지가 많다는 점이다. 특히 국사 과목이 거의 없는 교육 현실에서 드라마의 오류가 청소년들에게 끼치는 영향은 막대하다. 그래서 철저한 고증을 통해 더욱 신중한 접근이 요구된다. ‘이 드라마는 특정 인물과 직접 관련이 없습니다’라는 문구만으로 책임을 다했다고 한다면 엉터리 사극이 될 것이다.
이광형 문화생활부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