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을 만난 스포츠 예술이 되다… ‘의수 화가’ 석창우 그림전

입력 2011-08-21 17:35


아들이 태어난 지 한 달째인 1984년 10월 어느 날. 그는 한 의류 공장에서 전기 엔지니어로 근무하다 2만2000볼트의 고압 전류에 감전되는 사고로 두 팔과 발가락 일부를 잃었다. 13번의 수술을 거치면서 수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다. 사고 이후 실의에 빠져 살던 그가 새로운 희망의 빛을 찾은 때는 88년. 당시 네 살이던 아들이 아빠에게 그림을 그려달라고 졸랐다.

큰딸은 사고 전까지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면서 어느 정도 아빠 노릇을 해줬지만 둘째인 아들에게는 해준 것이 없어 미안한 마음에 의수에 볼펜을 끼워 참새와 까치 등을 그려줬다. 그는 “손이 없어서 아무것도 못하는 아빠가 아니라 손이 없어도 뭐든지 하는 아빠가 되고 싶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틈만 나면 화선지에 먹으로 드로잉을 했다.

석창우(56). 바람을 가르며 힘껏 달리거나 자전거 페달을 밟고 허공을 향해 높이 뛰어올라 회전하는 등 역동적인 그림을 보면 그가 상당히 활동적일 것 같지만 사실은 의수에 붓을 끼워 작업하는 장애인 작가다. 화실을 여러 군데 돌아다녔지만 팔이 없어 어렵겠다는 말만 듣던 중 서예가 여태명(원광대) 교수를 만나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웠다. 남편의 소질을 알아본 아내의 격려도 큰 힘이 됐다.

서예를 하다 점차 한지에 먹으로 누드 크로키를 그리는 작업으로 옮겨간 그는 98년 일본 나가노 동계올림픽 당시 여자 피겨스케이팅 은메달리스트였던 미국 선수 미셸 콴의 연기에 매료되면서 박찬호 김연아 등 운동선수들을 그리게 됐다. 누드 모델에게서는 볼 수 없는 강렬한 에너지를 운동선수에게서 발견했고, 자신이 그들처럼 움직이는 것 같은 대리만족을 느꼈기 때문이다.

보통 한 번 붓을 잡으면 빠르고 힘찬 놀림으로 단숨에 그리기 때문에 작품 1점이 짧게는 15초 만에 완성되기도 한다. 그러나 운동선수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이 머릿속에 각인돼 있어야 하기 때문에 경기 장면을 녹화해 수 차례 돌려보는 등 사전 작업이 필요하다. 경륜 장면을 담은 작품은 6개월간 경륜장을 찾아 경기를 지켜보며 원하는 동작들을 머리에 차곡차곡 담았다.

그렇게 작업한 그의 작품이 26일부터 9월 8일까지 서울 강남구 신사동 청작화랑에서 선보인다. 27일 시작되는 제13회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 맞춰 제작한 작품 30여점을 내놓는다. 대구세계육상조직위원회의 의뢰로 경기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 담긴 기념 부채 5만개가 제작되고, 경기 프로그램 책자 등에도 그의 작품이 일부 수록될 예정이다.

전시가 열리는 청작화랑은 청각장애인 조각가 신일수씨를 아들로 둔 손성례 대표가 해마다 장애인 작가 돕기 기획전을 마련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전시를 앞둔 석 작가는 “두 팔이 있었던 30년보다 없는 채 사는 지금이 더 재미있다”면서 “그림 속 인물들의 힘찬 동작들을 통해 힘들고 지친 사람들에게 희망과 환희를 선사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말했다(02-549-3112).

이광형 선임기자 g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