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김승욱] 자본주의 4.0과 공생발전
입력 2011-08-21 17:51
영국 경제평론가 아나톨리 칼레츠키는 ‘자본주의 4.0: 신자유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Capitalism 4.0: The Birth of a New Economy in the Aftermath of Crisis)’에서 2008년 9월 15일에 붕괴한 것은 은행과 집값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였고, 이때부터 새로운 자본주의 4.0이 시작됐다고 했다. 시장에 대한 정부의 간섭 축소를 강조했던 신자유주의와 달리 이제는 다시 정부의 간섭이 강화될 것이라고 했다. 신자유주의를 지지했던 한국의 보수 언론에서도 시장경제의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는 견해를 수용했다.
이명박 대통령도 광복절 경축사에서 시장경제가 새로운 단계로 진화해야 한다며 ‘공생발전(Ecosystemic Development)’을 국정철학으로 제시했다. 신자유주의 모델은 빈부격차를, 유럽의 복지 모델은 재정적자라는 한계를 드러냈다면서, 두 모델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약육강식의 정글에서 벗어나 ‘공생발전’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를 위해 동반성장과 대기업 책임론이 강조됐다. 정부가 대기업을 압박해 시장 생태계가 건강하게 되도록 만들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정부가 시장에 대한 간섭을 늘린다는 의미에서 자본주의 4.0시대의 조류와 일맥상통한다.
많은 이들이 새로운 자본주의 시대가 시작된 것처럼 말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지난 200년간의 자본주의 역사를 보면 마치 밀물과 썰물이 반복되듯 시장경제에서 정부의 역할이 주기적으로 커졌다 작아지기를 반복했다. 다니엘 에르긴 등은 ‘시장 대 국가’(원제: Commanding Heights)에서 20세기를 전투지휘소가 있는 고지(commanding heights)를 서로 차지하려고 시장과 정부가 전쟁을 했던 시대로 묘사했다. 시장 실패가 커지면 정부 개입이 증가하고, 그러다가 반대로 정부 실패가 너무 커지면 다시 시장 자율이 강조되던 게 지난 역사에서 반복됐다. 이유는 인간이 전지전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지적 능력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한 것으로 착각하지만 사실 우리는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다. 최근 주식시장의 붕괴를 보면 다시 이러한 사실을 절감한다.
지난 대선 때 정동영 후보가 한나라당식 정글 자본주의를 단호히 거부한다고 했고, 이명박 후보의 교육정책도 정글정책이라고 비난했다. 그런데 이번에 청와대 홍보수석은 공생발전을 설명하면서 “약육강식의 정글에서 벗어나 공존공생의 숲으로 가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대통령도 탐욕 경영, 부익부 빈익빈 등을 언급하면서 시장경제를 정글로 인식하고 있다. 약육강식이 아니라 정글의 숲과 생태계를 강조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정글을 언급함으로써 근본적으로는 자본주의의 경쟁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인정한 셈이다.
자본주의에서 경쟁을 통해 비효율적인 기업이 효율적인 기업으로 대체되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다. 이것을 부정적으로 보면 더 이상 자본주의가 아니다. 공생발전을 우월적 지위를 남용한 대기업의 불법을 막아 먹이사슬이 끊어지지 않게 한다는 의미로 사용한다면 문제가 없다. 그러나 약육강식을 없애 사자와 어린양이 함께 풀을 뜯는 낙원을 이룩하겠다는 식으로 이해하면 이것은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최대 약점은 약육강식의 비정함이 아니라 빈부격차가 확대된다는 점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공산주의는 경쟁을 근본적으로 없애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서구의 복지국가들은 강제로 세금을 거두어 해결하려고 했으나 역시 실패로 판명되고 있다. 자본주의의 약점을 보완하는 가장 바람직한 기독교적인 방법은 가진 자가 자발적으로 나누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회는 모든 사람이 동일한 능력을 갖고 서로 남남으로 사는 사회가 아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자발적으로 섬기고, 사랑을 베풀고 돕는 사회다. 오늘날 교회가 이러한 일을 너무 등한시하고, 빈부격차 해소를 정부에만 맡겼다. 복지국가의 대안은 대기업 비틀기가 아니라 자발적 나눔에서 찾아야 한다.
김승욱 중앙대 경제사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