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노경남 (4) 복음 거부하던 남자를 평생 동역자로

입력 2011-08-21 18:06


남편을 만난 것은 1987년이다. 밤에는 신학교를 다니고 낮에는 돈을 벌기 위해 제약회사에서 근무했다. 점심만 되면 식당과 사무실을 돌며 복음을 전했다. 대다수 직원들은 나를 예수쟁이로 불렀다.

생산관리를 맡고 있던 남편은 복음을 완강하게 거부했다. “여기 주먹 보이죠? 하나님이 어디 있어요? 나는 이 주먹만 믿습니다.” “음장호씨, 예수 믿으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천국의 기쁨을 누려보시는 게 어때요? 성경에선 예수 믿지 않으면 영원한 형벌에 처해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끈질기게 복음을 전하니 그도 지쳤던 것 같다. “좋습니다. 딱 한 번만 교회에 가 볼 테니 앞으론 예수의 예자도 꺼내지 마세요. 알겠죠?” “예.” 그렇게 부천 동산교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는 토요일 청년 예배에 한 번만 오기로 약속돼 있었다. “저기, 내일이 주일인데 한 번만 더 와 주시면 안 돼요?” 간청을 했다. 결국 남편은 동산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고 청년 회장까지 맡게 됐다.

나는 제약회사를 그만두고 88년 1월부터 부평북부교회 교육 전도사로 사역을 시작했다. 그때 아버지는 고향을 떠나 홀로 있는 내가 무척 걱정이 되셨던 것 같다. “경남아, 아비다. 네가 걱정돼 도저히 안 되겠다. 네가 일한다는 교회인지 뭔지 한번 가보자. 네가 마음에 들어 한다는 사람도 한번 만나보고.” 전남 장흥에서 올라온 아버지는 한눈에 남편을 만족스러워하셨다. “네가 말하던 청년이 저 친구냐? 싹싹하고 성실해 보이는 게 아주 마음에 드는구나.”

아버지는 그 길로 남편의 고향인 충북 괴산으로 내려가 어르신을 만났다. 그리고 남편이 다녔던 고등학교까지 찾아가 담임선생님을 만나고 생활기록부까지 확인했다. “대대장을 맡았고 교육감상까지 받았다고 하더라, 이 정도 사람이면 되겠다.”

91년 3월 9일 결혼식 날이 됐다. 그날 아침 나는 남편에게 황당한 선포를 해 버렸다. “내일이 주일이라 유치부 설교를 해야 하거든요. 주일은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야 하고 주중엔 꼭 나가야 할 전도활동도 있어요. 신혼여행을 나중에 가면 안 될까요?” 그 당시 우리 부부는 경제적으로 넉넉한 상황도 아니었다. 남편은 마지못해 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내 그럴 줄 알았어. 아무래도 나는 예수님 신부하고 결혼한 것 같아.” 신혼여행은 결혼 20주년이 되는 올해 가기로 했는데 기독교 대안학교를 운영하다 보니 아직도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

주례는 부천 심곡제일교회 박신환 목사님이 맡아 주셨다. 아버지는 목사님이 주례를 하시는 것을 못마땅해 하셨다. 모두가 비신자인 친척들을 앉혀 놓고 목사님이 주례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주례사 도중에 ‘주례가 너무 길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셨던 아버지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남편의 꿈은 학교를 운영하며 학생들에게 세계 선교의 비전을 주는 것이다. 결혼 후 지금까지 많은 시간을 주님께 드리며 사는데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함께해 주는 남편이 있어 지금의 모든 것이 가능했다.

선교와 전도를 하다 보니 우리 집은 늘 전도 대상자로 만원이다. 매주 토요일은 집을 개방해 알파 코스를 운영하기 때문에 더욱 바쁘다. 그런데도 기쁘게 손님을 맞이해 주는 남편을 보면 힘이 난다. 부부가 상대방의 꿈을 이루어 주고자 섬길 때 갑절로 복음의 능력이 발휘된다는 사실을 새삼 느낀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