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기독교 성지 순례] ‘선교사 양녀’ 유관순의 애국애족 모태
입력 2011-08-21 19:03
공주는 일제 강점기 충청지역 독립운동의 진원지였다. 그 중심엔 영명학교(현 영명고등학교)가 있었다. 감리교 선교사가 세운 영명학교의 두 기둥은 신앙과 애국이다. 신앙의 사회적 실천이라는 감리교의 정신과 맥이 닿아 있다. 영명학교는 일제와 한국전쟁이라는 질곡을 거치는 동안 무수한 민족지도자들을 배출했다. 영명학교는 캄캄한 시대를 오래도록 환하게 비추는(永明) 빛이었다.
영명고등학교에서는 공주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언덕 위 교정에서 공주를 내려다보며 10대 초반의 유관순 열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일본 제국주의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 조국을 끊임없이 되새기지 않았을까.
(25) 공주 영명고교(옛 영명학교)
영명고 교목 유혜종(54) 목사가 그 시절 유 열사의 얘기를 들려줬다. 유 목사는 영명학교가 유 열사의 모교인 줄은 1987년 9월 이 학교에 부임한 뒤에야 알았다고 했다. 그때부터 선교유적지 복원을 하나님의 소명으로 받아들였다.
1905년 내한한 샤프 선교사 부부가 감리교 선교를 위해 양명학교를 설립했다. 남편 샤프 선교사는 3년 만에 이질로 세상을 떠났다. 부인 사애리시(史愛理施·앨리스 샤프) 선교사는 충격을 받아 미국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남편의 죽음을 헛되게 할 수 없다’는 소명감을 갖고 다시 돌아와 헌신적으로 사역했다. 공주를 거점으로 대전, 논산, 천안을 돌아다니며 교회와 학교를 세웠다. 자녀가 없었던 사애리시는 가난한 집 자녀들을 후원하고 돌봤다. 천안에 살던 유관순도 그들 중 하나였다.
사애리시는 유관순의 부모를 설득해 그를 양녀로 삼았다. 그리고 11세 때인 1913년경에 영명학교에 입학시켰다. 일찍이 기독교를 받아들였던 집안 분위기와 함께 신앙을 바탕으로 한 사애리시의 헌신적인 사회·교육 활동은 어린 관순의 마음에 자연스럽게 롤모델로 자리잡아갔을 거란 게 유 목사의 설명이다.
3년 뒤 이화학당에 편입한 유 열사는 3·1운동이 일어나자 학생들과 함께 가두시위를 벌였다. 학교에 휴교령이 내리자 고향 천안과 모교가 있던 공주로 내려와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공주제일감리교회와 영명학교에서 태극기를 인쇄했다. 유 열사의 친오빠 우석, 사촌동생도 이 일에 가담했다. 음력 3월 1일 아우내장터 만세시위 주도로 일본 헌병대에 끌려간 유 열사는 공주교도소로 압송됐다가 결국 서대문형무소에서 죽어갔다.
유 열사의 흔적은 현재 영명학교의 교적부에 남아 있지 않다. 6·25 전쟁 때 공산군이 영명학교를 본부로 사용하면서 교적부를 모두 불태웠기 때문이다. 100주년기념탑 앞에 세워진 유 열사의 동상이 그녀가 영명학교 출신이었음을 보여주는 유일한 흔적이다. 유 열사의 동상 옆으로는 초대 내무부장관을 지냈던 조병옥 박사, 초대 충남도지사 황인식 박사의 흉상이 교정을 향해 있다. 영명학교가 배출한 대표적인 민족지도자다. 이들 외에도 중앙대를 설립한 임영신 박사, 국내 최초 여자 경찰서장을 지낸 노마리아, 한국 감리교 사상 첫 여자목사인 전밀라 등 각계 지도자들의 이름은 셀 수 없을 정도다. 그 옆엔 교사이자 선교사로서 이들을 돌보고 가르쳤던 사애리시의 추모비가 ‘신교육의 발상지’라는 바위 팻말과 함께 아담하게 세워져 있다.
유 목사를 따라 학교 뒤 산길을 올랐다. 5∼6기의 작은 무덤과 비석이 나왔다. 맨 뒤가 샤프 선교사, 그 앞으로는 샤프 선교사 후임으로 영명학교에서 사역했던 윌리엄 선교사의 두 아들 올리브와 조지의 묘비다. 그 아래로는 아벤트, 테일러 선교사의 자녀들이 묻혀 있다. 모두 2∼3세 혹은 8∼9세의 아이들로 제대로 빛도 보지 못한 채 풍토병이 창궐하는 선교지에서 묻힌 것이다.
산길을 옆으로 돌아가면 붉은 벽돌의 서양식 건물이 한 채 나온다. 샤프 선교사 부부의 사택이자 당시 감리교 선교본부터다. 지금은 개인에게 팔린 상태다. 유 목사에 따르면 이곳은 당시 선교사들의 회의 장소였을 뿐만 아니라 사애리시 선교사의 수양딸인 유 열사도 함께 기거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100년이 넘었지만 페인트칠만 약간 벗겨졌을 뿐 한눈에 봐도 튼실한 건물인 걸 알 수 있다.
유 목사는 현재 감리교회들을 대상으로 모금활동을 벌이고 있다. 감리교의 선교역사가 깃든 이곳을 복원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그렇게 되면 최근 문화재청으로부터 등록문화재 472호로 지정된 공주제일감리교회와 함께 충청지역의 대표적인 기독교 선교유적지가 된다.
15만㎡(4만8000평)가 넘는 영명고등학교 뒷산은 현재 그린벨트로 묶여 있다. 하지만 유 목사는 “모금이 본격화되고, 선교유적지의 뜻만 잘 전달된다면 지자체의 허락을 얻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애니메이션 순교 체험관, 게스트하우스 설립 계획도 벌써 세워 놨다.
유 목사는 “샤프·사애리시 선교사의 헌신적인 선교활동은 후손들이 반드시 기억하고 되새겨야 한다”며 “선교유적지 복원을 통해 공주 등 충청권 지역에도 복음의 생생한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라고 말했다.
공주=글·사진 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