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익은 사물의 낯섬 세계의 끝에서 새로 태어나는 세계… 이장욱 세 번째 시집 ‘생년월일’

입력 2011-08-19 17:36


“넌 누구냐?/ 가까워서 안 보여// 먼 눈송이와 가까운 눈송이가 하나의 폭설을 이룰 때/ 완전한 이야기가 태어나네/ 바위를 부수는 계란과 같이/ 사자를 뒤쫓는 사슴과 같이// 근육질의 눈송이들/ 허공은 꿈틀거리는 소리로 가득하네/ 너는 너무 가까워서/ 너에 대해 아름다운 이야기를 지을 수는 없지만// 드디어 최초의 눈송이가 된다는 것/ 점 점 점 멀어질수록/ 유일한 핵심에 가까워진다는 것/ 우리의 머리 위에 정교하게 도착한다는 것”(‘겨울의 원근법’ 부분)

199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해 시력 17년째에 접어든 이장욱(43)의 시는 폭설 내리는 벌판을 걷는 것처럼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의 세 번째 시집 ‘생년월일’(창비)은 이처럼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뒤섞인 감각적 이미지들을 매개로 해 이야기가 어떻게 탄생하는지를 실감 있게 보여준다. ‘생년월일’이라는 제목에서도 예감할 수 있듯 이번 시집은 생일에 대한 이야기랄 수 있는데 이장욱은 축복받아 마땅한 ‘생일’을 ‘불안’으로 경험하는 독특한 세계관을 지닌 시인이다.

“뒤라는 곳은 무한해. 내내 타오르고 있구나. 나는 자꾸 무너지면서 또/ 발생하는 세계를 바라보았다./ 빗줄기는 팔이 세 개였다가 다리가 열 개였다가 무수한 팔과 다리를 모아 못 박힌 채로/ 무한이 되는 사람”(‘뒤’ 부분)

무너지면서 발생하는 세계, 무너지면서 태어나는 세계란 크게 보자면 20세기라는 거대한 하나의 덩어리로서의 시대가 끝난 뒤에 다가온 21세기의 탄생을 함축한다. 작게 보자면 이장욱이 건너온 1980년대와 1990년대를 뒤로 하고 태어난 21세기적 자아 분열의 시대를 의미한다. ‘뒤’라는 시가 씌여진 배경에는 이런 거시 담론과 미시 담론이 섞여 있는 것이다. 기존 질서의 해체와 자아의 탈인칭화는 이장욱 시의 특징이기도 한데, 바로 그렇기에 그의 시는 여전히 해독이 어렵고 전위적이다.

“당신이 입을 벌리는 순간/ 생일에 대한 이야기가 솟아난다/ 그 다음엔 언제나 불안에 대한 이야기/ 반드시 그 순서로/ 당신은 말한다// 당신은 사차선 도로를 건너가는 개에 대해/ 싸이즈가 맞지 않는 외투에 대해/ 카드놀이의 불운에 대해/ 조금씩 넘친다// 골목 모퉁이에서 처음 보는 사람이 불쑥/ 춤을 추며 우리 앞에 나타나듯/ 당신은 말하는 법이니까”(‘당신이 말하는 순서’ 부분)

낯익은 서정에서 출발했으되, 전위로 나아간 게 이장욱이다. 왜 그는 전위로 나아갔을까. 비평가이기도 한 그는 서정의 ‘내파’와 ‘갱신’을 주장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고전적인 서정이 아니라 현대의 옷을 갈아입은 서정, 그것이 서정의 갱신인데 그는 조금 더 미래의 서정 쪽에 닿아 있는 것이다.

“외국어는 지붕과 함께 배운다./ 빗방울처럼./ 정교하게./ 오늘은 내가 누구입니까?/ 사망한 사람은 무엇으로 부릅니까?/ 비가 내리면// (중략) // 누구든 외롭다는 말은 나중에 배운다./ 시신으로서./ 사전도 없이./ 당신은 마침내 입술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매우 반복합니다.// 지붕이 빗방울들을 하나하나 깨닫듯이/ 진심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지금 발음한다./ 모국어가 없이 태어난 사람의/ 타오르는 입술로.”(‘오늘은 당신의 진심입니까?’ 부분)

지붕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이야말로 우리가 배우고 있는 외국어라는 말, 살아있는 동안엔 외롭다고 결코 말할 수 없는 오늘, 마침내 모국어를 지운 입술이 태어난다는 언어적 심층을 우리는 이장욱의 시에서 음미하게 된다. 그리하여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자면 세계는 어디에서 탄생하는가. 이장욱은 이렇게 대답한다.

“나의 왼발이 그의 오른발에 섞여 들고 그녀의 표정에 그의 시선이 뒤섞이는 지금을,/ 세계의 끝이라고 부르자. 신발의 종류와 헤어스타일, 그리고 교우관계에 이르러서야/ 완성되는 세계. 나는 이윽고.// 남녀노소가 되었다./ 그녀는 혼자 외우기 좋은 주문을 알게 되었고, 그는 개들의 침묵을 이해했으며, 나는 십년 전 어느 날의 중얼거림을 똑같이 반복했다. 여기는 어제의 힘으로만 도달할 수 있는 곳. 신호등은 빨강 초록 주황 빨강,/ 외로운가?”(‘세계의 끝’ 부분)

세계의 끝에서 세계가 탄생하고 있다. 매일 매일의 일상이 생일이고 오늘은 오늘의 생일이다.

정철훈 선임기자 c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