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이 점령한 도시 상처를 뚫고 한 떨기 꽃으로 피다… 한창훈 장편소설 ‘꽃의 나라’
입력 2011-08-19 17:35
한창훈(48)은 독특한 이력의 소설가다. 전남 여수 거문도에서 태어나 젊은 날엔 오징어잡이배나 양식 채취선을 타기도 했고 포장마차 운영, 공사판 잡부, 시골다방 DJ, 홍합공장 노동자, 그리고 여대 앞 브로치 노점상을 하기도 했다. 그의 소설은 이렇듯 몸에 새겨진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에 더욱 빛을 발한다. 그가 8년 만에 펴낸 장편 ‘꽃의 나라’(문학동네)도 예외는 아니다. 소설은 그가 고교 시절에 겪은 5·18광주민주화항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항구에서 출발한 기차는 산간지역과 갈대밭이 있는 마을을 번갈아 가로지른 다음에야 도시에 들어섰다. 이렇게 먼 거리를 이동한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역에 내려 앞으로 살게 될 곳을 훑어보았다. 도시는 컸다.”(9쪽)
항구의 시골 마을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이제 막 대도시 고등학교에 입학한 열일곱 살 소년 ‘나’는 처음 마주한 대도시의 모습이 낯설고 두렵지만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설레고 즐겁다. 하지만 꿈이 영글기도 전에 맞닥뜨린 건 도시의 어두운 이면이다. 도시 뒤편은 또래 아이들끼리 치고받는 싸움으로 얼룩져 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영문도 모른 채 누군가에게 심하게 구타당한다. “오라는 대로 얌전히 갔어도 때렸을 것이다. 내가 맞은 이유는 단 하나. 이곳이 멀고 낯선 곳이기 때문이다.”(21쪽)
‘나’는 폭력을 피해갈 수 없음을 깨닫고 교내 폭력서클에 들어간다. 집단에 들어가는 것이야말로 폭력에서 자신을 보호해줄 안전장치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폭력서클은 상대방 서클을 향해 으르렁거리지만 누구도 함부로 서로를 건드리지 않는다. ‘나’는 폭력이란 적절한 균형이 맞았을 때 저절로 잦아들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기우뚱한 폭력의 균형을 두고 작가는 생물교사의 입을 빌어 이렇게 중얼거린다. “십대는 비극이다. 공부를 잘해도 못해도 우리나라 안에서는 비극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모두 그렇다는 것이다.”(125쪽)
소설의 다른 한 축은 학교 밖의 사회다. 대학생들이 운동장에 모여 데모를 시작하고, 짓눌렸던 사회 모순을 거부하는 민주주의의 물결이 도시를 물들인다. 되풀이되는 데모 행렬과 매캐한 최루탄 냄새는 어느 새 고교생인 ‘나’에게도 일상처럼 익숙해진다. 도시는 거대한 자유의 울림통이 되어가고 사람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순식간에 탱크가 도시를 향해 밀려오고 갑자기 총을 쏘아대기 시작한다. 탱크의 포격으로 도시 건물들은 파괴된다.
“군인들은 인근의 집이나 건물, 학원, 여관 따위에 들어가 사람들을 모조리 끌고 나왔다. 끌려온 이들은 한바탕 얻어맞은 뒤 길바닥에 누워 좌우로 굴러야 했다. 머리카락과 맨살이 엉망이 된 다음에야 자신의 혁대로 스스로 손을 묶고, 묶은 손으로 옷은 든 채 트럭에 올라탔다. 그 모습이 스스로 털을 뽑고 기름통으로 들어가는 닭 같았다. 너무 많이들 그러고 있어서 우리가 원래 닭이었는데 잠시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187쪽)
폭력 앞에서 사람들은 속수무책 죽어간다. 사람들은 그 폭력을 해석하려 들지만 누구도 정확하게 말해주지 않는다. ‘나’는 군인들을 피해 도망치고, 고향 친구는 군인들의 총에 맞아 즉사한다. 인간이 태어나는 과정은 너무도 길고 복잡한데 죽음은 너무 빠르다. 너무 많은 죽음을 지켜보았을 작가는 짧고 긴박한 문장으로 국가폭력이 역사에 새겨놓은 상처를 이렇게 묘사한다.
“나의 떨림은 저 깊숙한, 맨 처음의 시작점에서 왔다. 죽어 있다는 것을 본다는 것, 죽어버린 생선, 그리고 죽어있는 사람, 그 사람의 세계가 정지되고 곧바로 소멸해간다는 것. 그리고 그게 나에게 찾아온다는 것.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과 노고에 비하면 죽는 순간은 너무 짧았다.”(228쪽)
한창훈은 “내가 믿는 것은 미움이며 미움의 힘”이라면서 “우리가 이렇게 앓고 있는 이유는 사랑하지 않아서 생긴 문제보다, 미워할 것을 분명하게 미워하지 않아서 생긴 게 더 많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소설은 비록 역사적 비극을 다루고 있지만 작가가 그 비극을 직접 몸으로 체험했기에 상처를 뚫고 작가의 몸에서 피어난 한 떨기 꽃인 것이다.
정철훈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