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뇌를 훔친 소설가’ 집필 석영중 교수 “거울뉴런… 도파민… 명쾌한 결론 뇌과학에 반했어요”
입력 2011-08-18 17:52
뇌과학과 문학의 접점을 탐구한 책을 한 권 쓴다고 해보자. 뇌과학자가 소설을 분석하는 게 쉬울까. 문학비평가가 문학 속 뇌과학 이야기를 찾아내 분석하는 게 빠를까. 나라면 전자에 한 표를 던진다. 현실도 그런듯하다. 문학을 논한 과학자는 제법 되지만, 문학은 좀체 제 영역을 벗어나는 법이 없다. 그래서 이 책의 용기는 눈에 띈다. 수줍은 문학이 과학에 구애했으니 말이다.
책이 가진 매력도 절반 이상 저자가 문학연구자라는 사실과 관련 있다. 석영중(52)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교수는 자칭 “가전제품 사용 설명서도 제대로 이해 못하는” 과학 문외한이다. “수학과 자연과학이라면 예전부터 끔찍이 싫어했다”는 그가 지난 2∼3년간 ‘브레인 사이언스(뇌과학)’와 ‘뉴로사이언스(신경과학)’ 관련 서적을 탐독했다. 뜻밖에 독서는 즐거웠다.
‘뇌를 훔친 소설가’는 뇌과학 비전문가가 용감하게 시도한 외도의 결과물이다. 책은 뇌과학을 잘모르던 문학연구자만이 구사할 수 있는 쉽고 명료한 언어로 뇌과학과 문학이 만나는 지점을 탐색했다.
모든 건 제목도 기억 안 나는 책 한 권에서 시작됐다고 했다. “뇌과학 관련해서 무슨 책인가를 읽는데 이게 재미있고 너무 이해가 잘 되는 거예요. 사실 뇌과학의 발견중 어떤것들은 문학계에서는 몇 백 년 전부터 알고 있었고 해왔던 얘기들이거든요. 이거 톨스토이가 벌써 한 얘긴데, 이건 도스토옙스키 작품에서 읽은 건데. 익히 알던 걸 생물학적으로 설명하고 실험으로 증명하니까 앞뒤가 딱딱 들어맞고 신기했던 거예요. 관련 서적을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했지요.”
‘뇌를 훔친 소설가’는 그런 발견들, 문학이 오래 알던 진리와 뇌과학이 새삼스럽게 증명해낸 사실 사이의 간극과 분석으로 채워졌다. 어려울 것 없는 이야기다. 문학작품을 읽을 때 독자는 주인공의 희로애락에 공감한다. 문학이 말하는 ‘감정이입’이다. 뇌과학적으로 말하자면, ‘거울 뉴런(다른 개체의 특정 움직임을 볼 때 활성화되는 신경세포)’이 타인의 행동을 간접 체험하도록 돕는 것이다.
소설을 너무 많이 읽어 상상 속 캐릭터와 사랑에 빠져버린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예브게니 오네긴’ 속 타티야나. 한 번 본 남자에게 운명을 건 그녀의 비합리적 연정도 거울 뉴런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타티야나는 거울 뉴런 덕에 이미 수백 권의 연애소설을 통해 사랑을 대리 체험했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속 사랑에 빠진 남자 레빈의 뇌는 흥분을 담당하는 신경전달물질 도파민의 홍수로 설명할 수 있다. 일종의 몰입 상태이다. 복수심에 불타는 ‘모비딕’(허먼 멜빌) 속 에이해브 선장과 시를 쓰며 몰아의 행복을 느낀 ‘닥터 지바고’(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주인공 지바고의 심리도 도파민의 작품이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등장하는 과자 마들렌도 빠질 수 없다. 과자의 향과 맛은 어떻게 추억으로 가는 지름길이 됐을까. 뇌과학의 답변은 이렇다. 미각과 후각 섬유는 뇌와 직접 연결된 반면 중간단계를 거치는 시각은 간접적이다. 시각보다 미각, 후각이 회상에 결정적인 감각이다. 저자는 “프루스트가 마들렌 운운하던 시절 심리학자들은 뇌에 대해 몰랐지만 프루스트는 후각과 미각이 가장 오래 기억되는 감각임을 직관적으로 알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석 교수는 시인 안나 아흐마토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시 전문가. 하지만 당분간 관심은 뇌과학과 문학의 경계에 머물 모양이다. 측두엽 간질을 앓았던 도스토옙스키는 다음 과제다. 도스토옙스키에게 나타났다는 하이퍼그라피아(hypergraphia·지나치게 많이 쓰는 증상)와 과종교증(hyperreligiosity·과도하게 종교적인 성향)에 대해서는 특히 할 말이 많았다.
“도스토옙스키가 많이 썼대도 전질로 30권밖에 안돼요. 톨스토이는 90권이나 썼는데 러시아 작가 치고 결코 많은 분량이 아니에요. 더구나 돈이 절박했기 때문에 썼던 거고. 또 도스토옙스키가 총살 직전에 살아난 걸 생각해보면 말년의 종교 귀의 역시 자연스럽고요. 간질보다 그의 사상에 초점을 맞추는 연구가 필요합니다.”
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