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위안부 역사 배우고 가르치길”… 일본군 위안부였던 길원옥 할머니
입력 2011-08-18 20:34
13세 때 고향 평양을 떠났다. 일본 공장에 취직시켜 돈을 벌게 해주겠다는 말에 속아 떠났다. 가보니 일본군위안부였다. 해방과 함께 고향행인 줄 알고 올라탄 배는 그녀를 엉뚱한 인천에다 내려놨다. ‘여비라도 마련해 고향으로 가자’는 생각으로 다방에 취업했던 게 평생 이산가족 신세가 될 줄은 몰랐다. 다방을 그만둔 뒤엔 혈혈단신으로 포장마차, 날품팔이를 전전하며 지내 왔다.
“먹고사는 데 바빠 누구 원망할 새도 없었지. 일어나면 하루 시작하고, 누우면 하루를 끝내고. 그게 전부였으니까.”
17일 오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운영하는 서울 충정로 3가의 쉼터 ‘우리집’에서 만난 길원옥(84) 할머니는 남의 얘기를 하듯 덤덤하게 옛일을 더듬었다. 일본군 성노예, 이산가족, 결혼도 못한 채 고아로 살아온 한 많은 인생이지만 그래도 뿌듯한 게 하나 있다.
힘겹게 생계를 이어오면서도 어떤 아주머니가 놓고 간 아기를 맡아 기른 것이다. 그 아이가 이제 중년의 나이가 돼 인천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할머니는 혹여 아들이 힘들어 할까봐 이름을 밝히지 말아 달라고 했다.
“목사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한 적은 한번도 없어. 그저 거짓말하지 않고 진실한 사람 되어 달라고만 했지. 거짓말 안하는 세상이 바른 세상이잖아.”
자식에 대한 미안한 마음도 토로했다. 아들의 교회는 현재 미자립 상태다. 두 명의 친자식이 있는 아들은 몇 년 전 한 아이를 입양했다. “엄마, 아빠 다 있는 가정에 입양됐으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텐데. 고아인 내 신세를 생각하지 못하고 괜히 떠맡았나 싶어.”
암울했던 조국의 현실을 복음으로 극복하고자 수십만명이 여의도광장에 집결했던 엑스플로74 대회. 길 할머니는 거기서 신앙을 갖게 됐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서로 얼굴을 붉히거나 종이조각 하나 버리지 않을 정도로 흐트러짐이 없는 거야. 통행금지 위반하는 사람도 없고.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구나’ 확신했지.”
길 할머니에게 신앙은 현실의 고달픔을 달래주는 힘이다. “내가 죄가 많아 세상에서는 제대로 못살았으니까 천국엔 반드시 가야 해.” 이 믿음이 지금까지 고단한 할머니를 떼밀고 왔다. 할머니는 요즘 모교회인 부천제일감리교회에 잘 나가지 못한다. “한번 다녀오면 일주일을 앓아누울 정도로 할머니 몸이 안 좋다”고 쉼터 손영미 소장이 귀띔했다. 대신 한국교회희망봉사단 김종생 목사와 쉼터 앞 경서교회 김태환 목사가 문안 겸해서 가끔 할머니를 찾는다.
길 할머니의 기도제목은 두 가지다. 한국 교회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다시는 할머니들이 당한 불행한 역사가 이 땅에 되풀이되지 않도록 교회가 앞장서 배우고 가르쳐야 한다고 했다. 역사를 알 때 불행의 대물림을 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길 할머니는 6년 전부터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주한일본대사관 앞 수요시위에 참가하고 있다. 그 전까지는 수요시위를 TV로 보면서도 ‘왜 저리 야단일까’라고 의아해하며 혼자서 상처를 삭였었다. 하지만 ‘부끄러워할 것은 내가 아니라 일본 정부’라는 사실을 깨닫고 수요시위에 참가하고 있다. 집도 아예 쉼터로 옮겼다. 이 날도 길 할머니는 비를 맞으며 일본대사관을 향해 사과와 배상을 촉구했다.
“20년이 다 되도록(수요시위는 1992년부터 시작됐다) 외치지만 대사관에서는 누구 하나 내다보는 사람이 없어. 잘못했으면 사과하고, 회개할 일 있으면 회개하는 게 인간이지. 자기들 땅을 떼어줘도 시원치 않을 판에 우리의 조그만 땅을 자기들 것이라고 우기는 걸 보면 겉은 사람인데 사람 같지가 않아.”
일본의 진정성 담긴 사죄를 듣고 눈을 감는 것, 길 할머니의 두 번째 기도제목이다.
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