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손수호] 아이들 밥값, 어른들 싸움

입력 2011-08-18 17:39


거리에 다시 플래카드가 나붙었다. 지하철 입구에선 낯선 사람들이 전단을 나눠준다. 청색 플래카드는 “망국적 복지 포퓰리즘이 나라를 결딴낸다”고 소리치고, 녹색 전단은 “부자 아이, 가난한 아이 편 가르는 나쁜 투표 거부하자”고 외친다.

서울에 큰 변고라도 생긴 것일까? 도시 경쟁력을 위해 경기도와 통합할 정도의 사안이 아니면 정치인들이 알아서 해야 한다. 아이들 밥을 놓고 시민들에게 투표함을 내미는 것은 서로 민망한 일이다. 정치하라고 뽑아준 사람들은 도대체 뭐 하길래 지방선거 1년이 조금 지난 시점에 이런 못난 짓을 하는가.

선거는 두 가지 자존심 싸움이다. 이 중 시장과 의회 간에 벌어진 자존심 대결은 시민을 안중에 두지 않는 몰염치다. 연임에 성공한 시장은 시민의 지속적인 사랑을 믿었고, 의회를 지배한 야당은 견제를 유권자의 명령으로 여겼다. 이 틈새에 감정이 끼어드니 크랙은 점점 더 커졌다. 주민투표는 무상급식조례안을 둘러싼 갈등의 산물이다. 182억원을 들여 선거를 치르게 된 데는 양쪽 모두 책임이 있다는 이야기다.

가난이 烙印 될 수 없어

아이들의 밥그릇에 관한 것도 자존심 문제다. 밥은 배고픔을 달래주지만 공짜 밥은 자존심이 목에 걸린다. 밥을 공짜로 줘도 가슴에 ‘낙인’을 찍어서는 안 된다. 여기까지는 이견이 없다가 밥값을 누가 낼 것인지를 놓고 다툼이 생긴다. 대체로 부자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한나라당은 부자 자식의 밥값은 부자 스스로 내라고 한다. 반대로 빈자를 옹호하는 민주당은 부잣집 자녀의 밥값도 국고에서 쓰자고 한다. 논법이 바뀐 것은 ‘낙인 효과’ 때문이다.

경계할 것은 ‘낙인’에 대한 과잉 해석이다. 낙인은 원래 소나 말의 엉덩이에 불에 달군 쇠붙이로 찍는 표시를 말한다. 드라마 ‘추노’에서 보았듯 노예나 죄인에 대해서도 찍었다. 창세기 4장 15절에서 가인(카인)에게 표식(mark)을 주는 장면도 소인(燒印)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야훼는 자비를 요청하는 카인을 내치며 누구도 죽이지 못하도록 죄인의 낙인을 찍은 것이다.

밥 굶는 아이들에게 나랏돈으로 밥을 먹이는 것도 낙인으로 볼 수 있을까. 가난이 죄가 아니라면 자존심 손상을 낙인으로 보기에는 무리다. 빈부는 밥이 아니어도 수많은 부분에서 확인 가능한 실체다. 주변의 많은 성공담에서 보듯 때로는 가난이 성취욕을 돋우는 기제가 될 수도 있으니 가난을 죄악시하는 시각 자체가 죄악이 될 수 있다.

다른 부분에서는 대체로 논리가 있다. 진보 교육감은 우리 살림 규모로 보아 아이들 밥은 세금으로 마음껏 먹일 수 있다거나, 보수 시장은 밥이 문제가 아니라 무분별한 복지확산은 재정파탄으로 이어져 나라의 미래가 걱정이라는 것으로 대별된다. 거칠게 말하면 시민들에게 보편적 복지와 선택적 복지에 대해 선택하면 된다.

주민투표로 복지원칙 잡자

이 정도면 양쪽에 논리가 있다. 그러니 착한 투표니, 나쁜 투표니 구분할 일은 아니어서 투표 자체를 거부하기보다 기표소에서 의사표시를 분명히 하는 것이 당당한 일이다. 더욱이 우리 사회의 복지논쟁은 한 번은 넘어야 할 고개다. 투표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여당 원내대표가 무상보육정책을 들고 나온다거나, 많은 정치인이 내년 총선에 미칠 영향만 살피는 것도 국민의 의중을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투표를 귀찮게 여기거나 정쟁의 차원으로 보지 말고 복지의 범위만 놓고 투표하는 게 좋겠다. 우리 시대의 화두가 되어있는 복지에 대해 시민의 솔직한 생각을 보여주는 것으로 투표의 의미는 충분하다. 이명박 정권이나 오세훈 시장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정책을 평가함으로써 사분오열 국민을 찢어놓고 있는 복지논쟁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손수호 논설위원 nam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