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드 & 토크] 내 가슴 속 고집불통 화가 김흥수

입력 2011-08-18 19:39


일생에 단 한 번도 타협을 해 본 적 없는 화가가 있다. 웬만한 그림이 아니면 그림은커녕 화가 취급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를 폭군 화가라고 부른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누구 앞이라 하더라도 할 소리, 못 할 소리, 고함을 질러댄다. 30여년을 옆에서 지켜본 그분은 분명 고함쟁이 영감이다.

그는 식민지 치하에서는 창씨개명과 학도병 참가를 거부했고, 특정한 구상 그림을 그려 출품하면 대통령상을 주겠다는 유혹도 단호히 뿌리칠 정도로 강직한 화가였다. 그는 고집불통의 김흥수 화가다.

1991년에 예술원상을 받고도 91세가 돼서야 예술원 회원이 된 그는 한없이 외로운 화가였다. 세속적인 명예에도 엎드리지 않고 오로지 93년 평생을 화가의 자존심 하나로 살아 온 그런 화가였다.

그래서 이름만 들어도 나는 그분 앞에서 언제나 옷깃을 여민다. 파블로 피카소만큼이나 숱한 화제와 염문을 뿌린 그의 예술과 인생, 명성과 경력은 국내외 화단에서 화려하다.

흰 바지에 백구두를 즐겨 입고 신어 ‘백바지 신사’로 불렸다. 90대 중반의 연세에도 젊은이 못지않은 그림에 대한 열정과 애착을 가진 그는 공공연히 자랑하기도 했다.

예술의전당에서 어린이들에게 영재 미술 교육을 하던 모습, 누드 모델 앞에서 꼼꼼하고 치열하게 그리던 모습…. 달라진 것이라곤 거의 없다. 예의 그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것이며, 미술계를 향해 날카롭게 비판하며 목청을 높여 쩌렁대는 제스처도 변함없다.

그는 그러면서도 지독한 화가다. 미술관을 지으면서 경제적으로 여러 가지 궁핍에 부닥쳐 있을 때도 이를 악물고 백여 점의 대작들을 남겨두고 나머지 20여점을 제주 현대미술관에 주저하지 않고 기증했다.

그에게 화가라는 직업은 운명이었다. 그가 첫돌 때 잡은 것이 바로 붓이었다고 하니 말이다. 집에서는 붓을 잡으면 공부 잘하고 벼슬길에 오르는 것으로 믿고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붓으로 그림을 그려 부모를 크게 실망시켰다. 동경미술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할 정도로 뛰어났던 그는 열아홉 살 때 처음으로 누드화를 그리기 위해 동갑내기 처녀의 옷을 벗기고 캔버스 앞에 앉았을 때의 황홀함을 두고두고 못 잊어 했다. 그러한 천부적인 끼와 재능 탓인지 평생 그는 여체를 그리는 누드 화가가 되었다.

추상과 구상이 누드화에서 멋진 조화를 이루는 것에서 착상을 얻어 조형주의, 즉 김흥수의 하모니즘이 탄생됐다. 그는 한 화면에 구상과 추상이 공존하는 것을 꿈꿔 왔다.

1977년 그의 하모니즘 개념은 음양의 철학이며 동양사상을 모태로 한다. 동양사상의 원류는 음양을 하나의 몸체로 갖는 태극에 있다. 태극은 우주의 본체로서 천지만물을 생성한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그의 하모니즘은 구상과 추상의 만남이라는 새로운 표현 방식으로 김흥수만의 독특한 어법과 독창성을 이룩했다. 그러나 그의 하모니즘은 외로웠고 그런 훌륭한 열정이나 가치만큼 세계적으로 빛나지 못했다.

이 때 그의 예술성을 믿고 평생을 함께하기로 한 천사가 학교 제자였던 장수현, 지금의 부인이다. 김흥수 화백이 정신적,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던 시기에 만났기에 그들에겐 ‘제자의 장래를 망치고 있다’, ‘유명 화가 덕에 출세하려 한다’는 등의 비난이 쏟아졌다.

이처럼 스승과 제자로 만나 92년 결혼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화단의 온갖 스캔들과 음해에 괴로워하며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김흥수 화백은 예술과 도덕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런 특별한 고정관념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내 글을 읽거나 내 그림을 보지 않아도 된다”고 큰소리치며 자신만만했다.

아름답고 젊은 여성들이 피카소에게 주었던 예술적 영감처럼 그녀는 평생 김흥수 화백에게 영감을 주었다. “나는 일생 동안 누드를 많이 그렸지만 그것은 단순히 여인의 피부, 누드의 표피만을 그린 것이 아니다. 인간으로서의 누드, 즉 희로애락을 가진 여인의 절실한 감성을 그린 것이다. 한 여성을 통해 들여다본 환희와 절망, 허무와 끝없는 욕망. 그것이 나의 예술에 들어 있는 독특한 세계”라고 고백했던 것이 이를 잘 말해준다.

그렇게 노화백을 보필하던 부인 장수현 관장도 2009년부터 항암치료를 받으며 투병 생활을 하고 있다. 한 달 전 뵌 선생님은 이런 상황에서 치료비며 경제적으로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하는 자신의 심경이 너무나도 괴롭다고 했다. 벌써 8년 동안 암에 시달려 우리를 안타깝게 했던 작가는 지친 노구를 이끌고 휠체어에 올라탄 채 새 작업을 하고 있다. 이젤과 병상을 옮겨 다니며 자신도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말이다.

나는 이렇게 평생을 자신의 예술 세계를 추구해 온 위대한 작가에게 겨우 한 끼 식사 대접밖에 할 수 없다.

김흥수 화백님이 못내 안쓰럽다.

김종근 <미술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