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랑한 일상 쫄깃하게 탈출하기… 제주 ‘쫄깃쎈타’ 여섯 남자 사는 법
입력 2011-08-19 01:27
통유리 창으로 옥빛 바다가 그림처럼 펼쳐진다. 시선을 집 안으로 돌리면 온통 책장이다. 한 사람은 만화책을 읽으며 킥킥대고, 한 사람은 창가에 기대 오수를 즐긴다. 또 한 사람은 바다에 뛰어든다. 이곳에 머무는 사람들은 무위(無爲)의 자유를 누리는 듯, 여유롭다.
제주 한림읍 협재리 1689의 1. 백사장이 끝나는 곳에서 조금 올라간 곳에 하얀 2층 집이 서 있다. 유명 웹툰 작가와 사업가, 건축가, 카피라이터, 애니메이션 작가, 통신장비업체 직원 30대 도시 남자 6명이 함께 지어 거주하는 곳이다. 입소문을 타면서 여행객들도 제법 많이 찾는다. 한 달 만에 1000여명이 다녀갔다.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 들렀다가 자아를 찾고 떠났다는 사람도 있다.
게스트하우스 이름은 ‘쫄깃쎈타’. ‘메가쑈킹’이라는 필명으로 알려진 웹툰 작가 고필헌(38)씨가 이름을 지었다. ‘쫄깃한 젤리처럼, 말랑말랑해 무르지도 않고 단단하지도 않아 즐겁게 세상 파고를 튕겨내자’는 뜻이 담겨 있단다. 내비게이션 상호명으로도 검색이 안 되는 이곳을 지난 16일 찾아갔다.
자유문화공간을 표방
오전 11시. 문을 열자 요란한 진공청소기 소리가 귀를 찔렀다. 청소 시간이다. 구릿빛 피부의 건장한 30대 남자는 땀을 뚝뚝 흘리면서 청소기를 밀고 있었다. 말소리는 소음에 묻혔으나 일본 듀오 ‘데파페페’의 기타 연주곡은 간간이 들렸다.
하얀 집, 하얀 문, 하얀 침대, 하얀 커튼. 하얀색을 인테리어의 기본 색상으로 하되 높은 천장과 사방을 둘러싼 책장, 부엌엔 포인트를 줬다. 각각 협재의 물빛을 상징하는 에메랄드 그린, 제주의 유채꽃 색에서 따온 노랑, 감귤색으로 페인트칠 했다. 세련된 감각이다.
방 안엔 햇볕에 잘 말린 보송보송한 침구가 놓여 있었다. 샤워실과 화장실은 공동의 사용공간이지만 혼자 쓰는 것처럼 청결했다. 지하 1층, 지상 1·2층인 이 건물에서 여행객들이 머물 수 있는 방은 5개. 하루 숙박료는 2만원이다. 최대 수용인원은 28명.
거실은 1800여권이 꽂힌 책장이 둘러쌌다. 철학서부터 실용서적, 만화책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여행자들의 바이블로 통하는 알랭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이 눈에 들어왔다.
서재와 부엌의 경계는 아일랜드 식탁이다. 식탁 위엔 과자가 반만 차 있는 유리병과, 젤리가 거의 동이 난 유리병이 놓여 있었다. 부엌에는 서로 다른 모양의 그릇과 컵, 와인 병 여러 개가 줄을 섰다. 냉장고에 붙어 있는 포스트잇에 적힌 글. ‘비닐봉지에 담긴 음식만 빼고 마음대로 드세요.’ 이 곳 손님들은 무언가를 계속 먹고 있다. 특히 곰 모양 젤리가 인기였다. 유리병에 채워 넣는 족족 사라졌다. 이곳에선 책을 읽거나, 사색하거나, 음악을 듣거나 자유다. 그러나 과음과 고성방가는 금물이다.
만실의 비결
“그날은 내무반만 비어 있는데요. 내무반이라도 괜찮다면 예약해 드리겠습니다. 세 분요.”
여대생기숙사 A·B, 남녀공학, 애기공장…. 여러 방이 있는데 남성전용방인 내무반이라도 내놓으라는 여성의 전화가 걸려왔다. 매일 만실이다. 예약은 11월까지 이어지고 있다.
왜 이렇게 인기일까. 제주도엔 이곳 말고도 게스트하우스만 200여개나 된다. 주변경관이 빼어나고 숙박비가 저렴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이곳엔 유독 나홀로 여행객이 많이 온다고 했다. 나도 혼자고 너도 혼자다 보니, ‘혼자’라는 점이 도리어 일종의 소속감, 연대감을 심어주는 게 아닐까.
최혜정(26·여·9급 공무원 시험 합격)씨는 “다른 게스트하우스에 가면 외로운데 이곳에선 쓸쓸하지 않다. 혼자인 게 오히려 여유롭다”고 말했다.
사소한 듯 보이지만 여행객을 사로 잡는 장치도 있다. 먼저 ‘메가쑈킹’ 고씨가 직접 끓여내는 아침 수프. 마트에서 산 ‘오뚜기 수프’에 제주산 감자와 양파를 듬뿍 넣어 끓이는 ‘메뚜기 수프(메가쑈킹이 만든 오뚜기 수프의 준말)’는 쫄깃쎈타의 별미다.
‘다이빙’도 인기 프로그램으로 자리잡았다. 메가쑈킹의 친동생 원헌(36·별명 ‘도련님’)씨가 우연히 해변가를 산책하다 다이빙하기 좋은 장소를 발견하면서 ‘구명조끼 입고 다이빙하기’가 방문객들 사이에 단골 코스가 됐다. 높이는 3m에 불과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한두 번 주저하다 어렵게 뛰어들 만큼 스릴을 느낄 수 있다. 얼마 전 그룹 ‘익스’의 이상미씨도 이곳에서 다이빙을 하고 돌아갔다. 바다에 풍덩 뛰어든 뒤 전에 없던 용기도 생겨났고, 그 덕에 자신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했다는 사람들.
“다이빙 해보려고요.”
울산에서 온 지리 선생님(31)이 나갈 채비를 하자 쫄깃쎈타 멤버가 따라나섰다.
자아를 찾고 간 사람
‘자아를 찾고 돌아간다’는 방문 후기가 눈길을 끈다.
3주간 머물다 지난 주말에 서울로 올라간 중학교 2학년 남학생은 게시판 벽에 서툰 필체로 ‘자아를 찾구 가요’라는 글을 남겼다. 머무는 동안 나이 많은 누나들을 따라다니며 맛있는 것만 얻어먹는 모습이 눈에 띄었을 뿐인데 의미심장한 글을 적어놓고 갔다.
‘자찾생(자아를 찾은 학생)’이란 말도 생겼다. 어른이건, 아이건,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목적,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알고 돌아간 사람들끼리 온·오프라인 모임도 만들었다.
수많은 책과 혼자 여행하는 사람들만의 아우라, 아름다운 자연은 사람들을 깨달음으로 이끄는 힘이 있다.
쫄깃패밀리
키 177㎝. 바람 불면 날아갈 듯 마른 체격. 검은 콧수염과 턱수염, 질끈 묶은 곱슬머리. 보기만 해도 덥다. 게다가 검정 티셔츠에 긴 청바지 차림이다. 이 남자가 대표 주인장 고필헌씨다. ‘메가형’이라 불렸다. 이들은 서로를 이름보다 별명으로 부르기를 좋아했다. 메가형은 지난해 9월 제주에 오자마자 협재 해수욕장 인근 민박집을 구입했다. 원헌씨와 아는 동생 강민석(36·애니메이터·별명 ‘브루스’)씨가 거들었다. 대출도 받았다.
게스트하우스 겸 제주를 대표하는 청년 아지트, 문화공간을 만들겠다며 야심 차게 공사를 시작했건만 업자는 뼈대만 만들어놓고 손을 놨다. 건축에 문외한인 남자 셋이서 공사를 강행하기에는 무리였다. 인터넷에 ‘쫄깃패밀리(이하 쫄패)’ 모집 공고를 냈다. 평생 무료숙박권, 제주 정착 시 아낌없는 지원 등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100여명이 지원했다. 최종 선발된 이는 카피라이터, 전직 통신장비업체 직원과 휴대전화 부품 개발자, 취업 준비생 30대 남자 4명이었다(2명은 후에 개인 사정상 서울로 올라갔다). 여기에 캐나다에서 10여년 간 목조주택을 지은 경험이 있는 건축업자 윤영현(36·별명 ‘하마’)씨가 합류했다.
제주에 온 사연은 각자 달랐다.
도련님은 도넛 프랜차이즈 주주답게 사업 구상을 하고 있다. 형의 감성과 콘텐츠에 자신의 사업가적 역량을 합쳐 이곳에 배낭여행 성지를 만들겠다는 꿈을 품고 있다. 모델은 전 세계 배낭여행객들이 가장 많이 모여든다는 태국의 ‘카오산로드’다.
브루스는 귀향자다. 제주에서 태어나 열 살까지 제주에서 산 그는 제주만 생각하면 늘 가슴이 벅차오르는 통에 12년간의 애니메이터 삶을 접고 결단을 내렸다. 그는 제주의 다른 게스트하우스 스탭으로 한 달간 경험을 쌓은 뒤, 쫄깃쎈타 매니저 역할을 맡고 있다. 그러나 본인이 생각하는 본업은 화가다. 전공(회화과)을 살려 조만간 그림을 그릴 생각이다.
쿵떡팬더는 통신장비업체 과장을 지낸 박준석(36)씨의 별명이다. 월급은 많았지만 각박한 도시생활이 싫어 직장을 뛰쳐나왔다. 모친은 “네가 어릴 때부터 공기 좋은 델 좋아해서 애답지 않았다”며 그의 결정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그는 아마도 수년 내 농사를 지을 것이다.
하마는 쫄깃쎈타 공사만 돕고 캐나다로 돌아갈 예정이었으나, 제주가 마음에 든다며 마음을 바꿨다. 이미 다른 게스트하우스의 공사를 수주했다. 멤버 중 가장 빨리 정착에 성공했다.
쫄패 막내로 카피라이터 출신 이윤석(35·별명 ‘비담’)씨는 자칭 쫄깃쎈타의 ‘비주얼’을 담당한다는데 모슬포에 있어 이날 만날 수 없었다.
이들이 집을 완성하는 데 4개월이 걸렸다. 공사를 끝낸 뒤 ‘쫄깃쎈타’라는 문패를 걸었을 때의 짜릿함은 메가쑈킹식 표현에 따르면 ‘산 정상에서 초코파이를 먹었을 때의 감동, 그 이상’이었다.
메가쑈킹의 꿈
-왜 게스트하우스죠?.
“다양한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이니까 어울리면서 재미난 아이디어도 얻고. 홍대 ‘제너럴 닥터(병원+카페+문화공간)’라는 곳에서 영감을 얻었죠.”
-왜 제주인가요.
“제주 젊은이들이 문화적인 갈증을 채우러 육지로 올라가요. 굳이 육지로 가지 않더라도 즐길 수 있게 하자, 나아가 육지에서도 문화를 즐기기 위해 제주로 오게 하는, 재밌는 걸 많이 해보려고 해요.”
-협재를 택한 이유는.
“바다가 너무 예뻐서.”
메가쑈킹은 우스갯소리를 할 때도 웃지 않았다. 눈빛은 강렬했다.
그는 유치원 때부터 만화가를 꿈꿨으나 대학 졸업장을 따야 한다는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만화가의 문하생이 되는 대신 식품영양학과에 진학했다. 동기 중 청일점이었다. 졸업 후 한식 조리사로 서른 살까지 일했지만 이건 아니다 싶어 그만두고 좋아하던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마침 웹툰 붐이 일어 통장에 돈이 들어왔다. 어릴 적부터 유명 만화가가 될 거라는 꿈은 현실이 됐다. 그러다 지난해 개인사정으로 만화 연재를 중단한 뒤 제주로 내려왔다. 쫄깃쎈타를 운영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매일 접하는 것에 재미를 느꼈다.
그는 다시 슬슬 만화가 그리고 싶어진다고 했다. 이미 지하 1층은 작업실을 마련하기 위한 공사가 한창이었다.
오후 4시가 되자 그는 졸았다. 손님은 다 나갔다. 소파에 길게 엎드려 뻗은 메가쑈킹과, 바닥에 누운 브루스만 남았다.
스피커에선 두 시간째 쿠바의 부자(父子) 재즈 피아니스트 베보발데즈와 추초발데즈의 연주곡 ‘영원히 함께(Juntos Para Siempre)’가 흘러나오는 중이다. 메가쑈킹이 추천한 책을 펼쳤다. ‘월든.’ 미 사상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가 1845년 여름부터 2년 여간 도심을 떠나 월든 호반에 통나무집을 짓고 최소한의 것만 소유하며 느낀 일상을 기록한 책이다. 그러고 보니 메가쑈킹과 소로우는 어딘가 닮은 꼴이다.
‘나는 타고난 은둔자는 아니다. 내 집에는 세 개의 의자가 있다. 하나는 고독을 위한 것이고, 둘은 우정을 위한 것이고, 셋은 사교를 위한 것이다.(월든 중에서)’
의자 수를 세어 봤다. 하나, 둘, 셋. 셋이다.
해가 떨어졌다. 하얀 집도, 바다도 감귤 색으로 물들었다.
제주=글 이경선 기자, 사진 강민석 선임기자 boky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