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신학강좌] 교회의 역사

입력 2011-08-18 18:17


분리주의파 청교도운동(2)

메이플라워호 항해 도중 한 명이 사망했다. 그러나 배에서 한 명의 어린아이가 출생함으로서 역시 출발할 때와 똑같이 102명이 무사히 항해를 마쳤다. 그들은 흩어지기 전에 바위(‘플리머스 바위’로 지금도 미국 메사추세츠 주 플리머스 해변가에 보존되어 있음)를 붙들고 눈물과 감격으로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다.

그들은 도착 후 1년 안에 풍토병, 아메리칸 인디언의 습격 등으로 반이 죽게 되었다. 하지만 매사추오이 추장의 호의로 인디언과 화해, 11월 넷째 목요일 랍스터와 칠면조 구이 그리고 첫 추수곡식으로 제단을 만들어 감격스런 첫 번째 ‘추수 감사절’을 지켰다.

먼저 예배당과 학교를 짓고 다음에 살 집을 지었다. 지금도 플리머스에 세워진 여신상(8년 동안 만들어진 미국 건국정신이 들어있는 탑)에 보면 가장 큰 중간 기둥에 신앙이 새겨져 있다. 그 다음에 작은 보조기둥 넷이 있는데 교육 자유 도덕 그리고 법 순으로 새겨져 있다. 교육은 지혜와 젊음을 준다는 상징적인 글이 새겨져 있다. 자유는 폭력(영국 왕과 영국국교의 폭력을 상징함)으로부터 해방되어 평화를 누리게 됨을 해설해 주고 있으며, 법은 법을 지키는 자에게 자비를 베풀고 법을 어기는 자에게는 정의로 다스린다는 글이 담겼다. 도덕은 복음전파자와 예언자가 세워 준다는 상징적인 표현이 조각되어 있다. 그러나 이렇게 드높은 도덕정신과 교육정신으로 세워진 미국은 오늘날 청교도 정신을 잃어버리고 소비문화와 향락문화에 빠져 있다. 교회도 점점 힘을 잃어버리고 있다.

청교도 운동의 또 다른 분파인 침례교회 운동은 존 스미스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영국국교의 목사였으며, 재세례파 중의 온건파였던 메노나이트(비폭력 평화주의)의 영향도 많이 받은 인물이었다.

그는 게인스보로우 회중교회의 목사로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망명 갔다. 그런데 암스테르담에서 또 다른 회중교회 목사 프랜시스 존슨과 논쟁하게 되었다. 스미스와 존슨의 논쟁 이슈는 침례였다. 새 교인을 교회에 받아들일 때 하나님에 대한 회개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을 침례를 받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1608년 스미스 자신이 침례를 받고 다른 사람에게도 침례를 베풂으로써 네덜란드 땅에 ‘제일영국침례교회’를 세웠다. 스미스는 칼뱅주의의 예정론을 비판하고 알미니우스주의 자유의지론을 받아들였다.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를 위해 죽으셨다는 만인속죄론을 주장하였고 재세례파 입장을 일부 받아들였다.

토머스 헬리스와 존 멀튼이 스미스의 뒤를 이어 영국적인 영국침례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또한, 헨리 제이콥의 독립교회 회중 중의 소그룹이 신자의 세례(유아세례 반대)를 주장하면서 제이콥의 독립교회 회중에서 나와 따로 제2의 침례교파를 만들게 되었다. 이들은 알미니우스주의를 반대하고 칼뱅주의의 예정론과 제한된 속죄론(구원받도록 예정되고 선택된 자들만을 위해 그리스도의 속죄가 필요하다는)을 믿었다. 이들을 칼뱅주의적 침례교회라고 부른다.

김홍기 총장 (감리회신학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