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으로 본 기독교 100년] 고영규젼 (애니 베어드 지음, 예수교서회, 1911)
입력 2011-08-17 19:33
이 책은 선교사 애니 베어드(Annie L. Baird, 1864∼1916)가 쓴 기독교 소설집인데, ‘고영규젼’과 ‘부부의 모본’ 두 편의 단편소설이 순한글 세로쓰기로 실려 있다.
‘고영규젼’은 기독교를 몰랐던 고영규와 아내 길보배의 결혼생활 이야기이다. 고영규는 착하고 총명한 길보배가 계속 딸만 셋을 낳자 아내를 핍박하고 외도를 일삼더니 급기야 가출하여 허랑방탕하게 지낸다. 결국 도박을 하다가 감옥에 갇히는데, 감옥에서 전도자를 만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새 사람이 된다. 길보배는 어려운 살림 속에서 귀신보다 힘이 있다는 예수를 믿고자 애쓴다. 아내가 보내준 돈으로 감옥에서 나온 고영규는 화목한 가정을 만들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한다.
이 작품은 당시 조선 사회에 팽배했던 남존여비사상과 남아선호사상을 비판하며 새로운 길을 제시한다. ‘집 나간 탕자의 비유’에서처럼 다시 돌아온 남편에게 길보배는 “계집아이만 낳은 것을 용서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고영규는 “딸만 낳아도 네 탓이라 욕하지 않겠다”고 대답한다. 아내가 “어디서 이 같은 새 마음을 얻었느냐”고 물으니, 고영규는 “예수를 믿고 그 분부하심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분명하게 일러준다. 그리고 내외가 서로 다정히 앉아 밤새도록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서로 경험했던 일들을 다 말하고 피차 용서하며 함께 웃고 행복해한다.
‘부부의 모본’은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한 박명실과 아내 양진주의 부부생활 이야기이다. 독실한 신앙을 지닌 이 부부는 서로 아끼며 화목한 결혼생활을 한다. 그러나 기독교인이지만 구습에 젖어 있는 시어머니는 이들 부부를 시기하여 며느리를 구박한다. 그때마다 박명실은 아내를 변호한다. 그러던 어느 날 박명실 내외와 모친은 옆집의 부부가 다투다가 그 아내가 도망가는 것을 보게 된다. 이때 모친은 아들이 하는 일이 옳다고 깨닫는다.
이 작품은 바람직한 부부관계를 가부장 중심의 봉건적 방식이 아니라 부부 중심의 기독교적 방식에서 찾고 있으며, 아울러 성경에 기초한 새로운 가정의 모습을 보여준다. 양진주가 임신 중 남편의 말을 따라 태교에 힘쓰고 힘든 일을 하지 않자, 시어머니는 화가 나서 게으른 며느리라고 야단친다. 이때 박명실은 모친에게 이렇게 말한다. “에베소서 5장 31절에 ‘사람이 장가가면 그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신 말씀을 생각하여 보니, 내 사랑하는 모친이라도 우리 부부의 정을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말하자면, 성경에 의거하여 유교적인 효의 윤리보다 부부의 정을 앞세우고 있는 것이다.
끝으로, 저자는 결혼생활의 원칙은 서로 아끼고 피차 용서하며 서로 참고 견디는 것이라고 밝힌 다음, “이대로 행하면, 부부가 후세상 낙원에 들어가서 영원한 복을 누릴 뿐만 아니라 이 누추한 세상에 있을 때라도 낙원을 만들고 그 가운데 있을 수 있으리니 조선 나라도 이 같은 금슬지락으로 집집이 채우기”를 권면한다.
저자는 숭실대학을 설립한 선교사 베어드(W. M. Baird, 한국명 배위량)의 부인으로 1891년 한국에 와서 1916년 별세할 때까지 선교와 교육 및 저술에 힘을 쏟았다. 물리학 동물학 식물학 교과서를 편찬했고, 찬송가 번역사업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현행 찬송가에 나와 있는 ‘멀리 멀리 갔더니’ 등이 그녀의 번역이다.
‘고영규젼’은 외국인이 한글로 쓴 소설로서 저자의 20년 한국생활 체험이 응축되어 있고, 한국인의 정서를 아름다운 우리말로 잘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선교를 위해 펴낸 것이지만 근대 한국문학을 풍성하게 하는 데에도 기여하고 있다.
부길만 교수(동원대 광고편집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