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술 회고록] 경기 수원시 정자동 김영옥 할머니
입력 2011-08-17 10:48
“중학교 가고 싶었는데… 위안부 안끌려 가려고 결혼했지”
김영옥(85·새동산교회 권사·경기 수원시 정자동) 할머니는 매년 광복절이면 왠지 모를 아쉬움이 있었다. 꽃다웠던 청소년기를 일제 하에서 보내지 않았더라면 지금과 다른 인생을 살지 않았을까 하는 미련 때문이다. 김 할머니는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정신대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서둘러 결혼했다. 일본의 극심한 공출로 시집에서는 난생 처음 배도 곯았다.
비록 꿈은 접어야 했지만 재능이 많았던 김 할머니는 자녀 교육에 직접 나섰다. 5남1녀의 자녀를 모두 훌륭하게 키워냈다. 자녀와 손자, 손녀 모두 하나님의 자녀로 잘 자라주었다.
김 할머니의 남은 소원은 전 세계가 평화롭게 사는 것이다. “큰 전쟁을 다 겪었잖아요. 앞으로 자손들은 그런 일 보지 말고 살아야지요. 평화롭게 누구든 미워할 거 없고 다 사랑하고 다 잘 살아야 혀요.”
공부 욕심 많던 어린 시절
충남 서산시 부석면에서 태어났어요. 거기서 아버지 돌아가셨어요. 거기 때 일은 잊어버려서 알지도 못해요. 어머니가 그러는데 옛날에 아버지는 머리가 좋아서 무역했대요. 어머니는 경기 안산서 93세에 돌아가시고 언니는 대전 살다가 작년에 86세 때 돌아가시고. 성<형>하고 나하고 둘밖에 없어. 제 밑으로 남동생 셋 낳았는데 다 죽었대. 오빠 있는 게 제일 불것어<부러웠어>. 그래서 아들 오형제 낳았다니께. 딸은 하나 낳았지. 막내딸이 저 외롭게 오빠들만 있다고 뭐라 하네. 아들 삼형제 낳고 딸 하나 낳았는데 그건 죽고 또 아들 낳았네. 딸은 끝으로 하나 낳았지.
언니가 열두 살 먹도록 학교를 안 넣어 갖고 둘이 똑같이 입학하러 갔는데 언니를 안 받아주는 거예요. 나이 많다고. 나는 열 살이라고 됐어요. 나는 받아도 언니를 안 받아주니 언니가 학교에서 와야지. 나도 학교 다닌다고. 그래서 어머니가 “야 널랑 내년에 들어가고 성부터 넣자” 해서 양보했네. 그 뒤 해에 가니께 열한 살이라고 안 받아주네. 언니는 받아주고. 그래서 서산간이학교(초등학교 분교)라고 있어요. 분교라도 반장하고 다 했어요. 열한 살에 들어가서 1학년부터 다녔어요. 집에서 국문은 다 알아갖고 가고. 그때는 학교에선 조선말 가르치나 순사가 문 앞에서 지켜 섰는데. 아이들이 일본 말 못하면 오줌 똥 막 쌌다니께. 일본 선생이 소변보러 갔다 오겠다고 일본 말로 해야 보내지. 아이들이 일본 말 못하면 옷에다 막 쌌어요. 그렇게 심하게 했어요.
왜정<일제강점기> 때 분교는 일반 학교보다 좋았어요. 분교라 한글을 가르쳐요. 한 시간씩 몰래. 한문하고 편지 하게끔 다 가르쳤시요. 그러니까 만날 우리 성이 “너 뭐 허냐. 내가 숙제해 줄게. 나 한문 좀 일러줘” 그랬어. 두 살 적으니께. 분교는 조선 사람이 선생 했어요. 부락 사람이요. 학생이 남자 여자 합해서 30, 40명 됐어요. 많았어요. 못허는 애는 3년 돼도 1학년이야. 그때는 낙제했어요. 제 점수 못 차면 그때는 안 올려줬어. 난 계속 올라갔어요. 아버지 어머니가 좋아했지요.
어릴 때 더 배우고 싶어서 우리 어머니 보고 만날 우는겨. 시집보내지 말고 학교 보내 달라고. 딸이라고 더 안 가르쳐. 그때는 중학교만 마치면 공무원 다 해요. 배운 여자들이 없어서. 그렇게 안 가르친다고 내가 만날 뭐라 그랬어요. 우리 언니도 그러고. 선생할 건데 안 가르치고 시집보냈다고 야단났지요.
상을 많이 탔는데 시집올 때 조그만 궤에다 넣어서 후대에 아이들 보여주게 내버리지 말라고 했는데 살다가 보니께 아버지가 소용없다고 다 불을 놨네. 어떻게 속이 상한지 죽을 뻔 했네. 졸업할 때 상을 여섯 가지나 탔는데. 개근상은 한 번 안 빠지고 타고 우등상, 전체 회장상 다 탔어요. 학교 선생님이 어디 가시면서 나더러 가르치라고 하면 내가 다 가르치고. 다른 선생들 오면 나더러 책 똑똑히 읽는다고 책 읽으라고 했어요. 그래서 상 많이 탔어요.
공출로 배곯다
열여덟 살에 충남 태안군 태안읍 장산리로 시집갔어요. 왜정 때 여자들 잡아다가 노무자 보내지 않았어요? 정신대. 그것 가는 것보다 낫다고 우리 어머니가 시집보냈어요. 열여섯 살에 졸업했는데 2년 있다 시집보냈어요. 스물네 살 총각이 처음 나왔다고 우리 집에서 거기로 시집보냈어요. 남자라면 노무자 아니면 징용 보내는데 스물두 살까지 징용가요. 스물네 살이라 면했으니께 이모가 중신했어요. 여섯 살 많은 태안 사는 고후종씨여. 4남3녀의 둘째예요. 관청에서 자꾸 노무자로 보내려고 해서 신랑은 결혼하고 1년도 못 살고 인천 가서 있었어요. 난 혼자 살고 추석, 설 때나 내려왔어요. 해방되자 완전히 내려왔어요.
언니도 열아홉에 시집갔어요. 친구들도 왜정 땐 노무자 안 끌려가려고 시집보내고 야단났지. 호적 등본 해놔야지. 나는 어리다고 혼인신고부터 해놨지. 조그만 게 머리 올리고. 넘<남> 부끄러워서 못 살겠어. 어머니더러 머리 잘라 달라고 했지. 시집가니께 그 동네는 다 쪽지고 다니네. 그러니까 표 완전히 났잖아요. 그것도 처음에 기르느라고 애먹었어.
시집가고 그 뒤에 해방되데. 밭에 갔는데 풍물 치고 오길래 웬일인가 했지. 점심 먹으러 오니께 해방됐다고 동네방네 다 다니며 춤추고 야단났더라고 사람들이.
큰며느리가 아닌데 큰아들이 죽어서 내가 큰며느리 노릇 다 했어요. 시어머니 시아버지와 살다가 돌아가시고 내가 다했어요. 왜정 때 농사지은 거 공출해서 싹 뺏어 가니께 배를 얼마나 곯았는지 몰라요. 그때는 시집가기 전에는 배 곯아 본 적 없는데 시집가서는 배도 곯아 보고 해보지 않던 너물<나물> 뜯으러 다니고. 거기는 시골이라 쌨지요<많았지요>. 생전 처음 해봤시유.
그때는 동태가 지금보다 귀해요. 우리 어머니는 딸 둘 먹인다고 생태 사서 찌개해서 뜨뜻하게 지져다가 딸 둘 방학이면 먹이고. 점심도 한 끼 안 굶고 살다가 시집가서는 다 뺏겼으니 뭐 있어. 겨울에 밥 굶기가 일상이지. 점심은 안 먹어요. 시댁은 농사만 지었어요. 밭매고 논매고 콩 두드리고.
어머니가 싸고 키워서 공부하고 바느질 가르치고. 그것만 했어요. 근데 시집가서 밭매고 논매고 모심고 다 했다니께. 사내들 없응게. 그때 군대가 6년이었어요. 셋째는 군대 가서 동서가 우리 집에서 같이 살고 같이 일했어요. 그 집 농사 다 지어주고 거름 보내주고. 시집가서 고생을 직싸게<심하게> 했어요. 열다섯 식구 먹여 살리느라 일만 했시우.
또 한 번의 전쟁
6·25 나고 또 다 뺏겼어요. 우리 큰시아주버님이 공산당에 들어가면 일 않고 배불리 먹는다고 하니께 도장을 찍었어요. 아무것도 모르고 일만 하는 양반이 당에 들었어요. 우리 집이 당 들었다고 뭐이고 다 가져가는 거야. 저녁이면 짚에다 불 쏘놓고 닭 있으면 닭 잡아다 먹고 다 가져다 썼어요. 그때 집집마다 안 죽은 사람 없었어요. 큰시아주버님이 총 맞아 죽었어요. 그래서 내가 더 고생했어요. 태안 반곡리로 갔다가 시아주버님이 죽는 통에 도로 올라왔당께. 큰애 배 갖고 내려갔다가 세 살 때 다시 올라왔어요. 그 집에 큰동세<큰동서>가 산다고 해서. 큰동세가 외로워 못산다고 야단해서 셋째 시아주버니가 읍내로 데리고 나갔지. 에이 부산했어요. 아주.
형부는 이때 순경해서 잡혀 죽었어요. 학교 마룻바닥 뜯고 숨겨 놓고 밥 가져다 먹이고 했어요. 근데 고모부 왔다고 보러 갔다가 숨어 있던 사람이니까 얼굴이 하얗잖아요. 그래서 잡혀서 죽었어. 하필 고모부가 빨갱이네. 일주일만 참았으면 국군들 들어오는데. 얼마나 잘생기고 노래도 잘하고 훌륭했는데. 아이들이 다 잘돼서 성은 호강하고 돌아갔어요. 작년에. 딸 셋, 아들 둘. 친정어머니가 아이들 키워 주고 도와줬어요.
허가 맞고 교회 나가다
교회는 태안서도 14년 다녔으니까 오라지요<오래됐지요>. 마흔 아홉인가 때 많이 아펐시유. 우리 어머니는 예수 안 믿으니께 점쟁이 데려 와서 점보고 난리가 났었어요. 큰아들 군대 보내고 우느라 정신은 없는데 일하러 다녔더니 위장병이 생겼더라고요. 은행 다니는 둘째아들이 서울 신촌 막내시누네 있었는데 데리러 왔어요. 어머니 시골에 놔두면 큰일 나겠다고. 서울서 고치자고. 큰 병원 다 다녔어요. 약 넉 달 먹고 나았어요.
고칠 때 막내시누가 신학대학 다녔어요. 시누네 가 있는데 부흥회 가자고 하대. 서대문에 현신애 권사가 유명하대. “성은 만날 마귀에 붙들려서 그러니께 나하고 가자”고. 무서워서 교회도 못 가게 붙잡고 죽도 못 먹고 앓으니께. 갔는데 밤 12시가 넘었는데 좋다고 손바닥 치고 노래하고, 나는 거기가 싫어 무섭기도 하고. 서선희 권사가 안수하면 병자들이 다 나자빠지니까 무서워 죽겄어. 이내 깨나지도 않더라고. 그거 보고 가자고 하는데 시누는 좋대요. 1시까지 그러는데 배고프다고 가자고 졸라서 겨우 집에 왔어요. 근데 옷 벗다 말고 내가 나자빠졌어요. 마귀가 아마 그때 쫓겨 나갔던가봐. 귀로는 다 들리는데 혀를 놀리지 못해요. 새벽 3시부터 말을 못하다가 7시 되니께 살아나더라고요.
그때부터 시누가 안 되겠다고 성경책 사주고 집에 가서 열심히 교회 나가라고 했어요. 집에 와서 그때부터 교회 댕기고. 시아버지 시어머니도 너는 죽을 사람이 살아났응게 아무렇게나 하라고. 그렇게 미신 지키는 시어머니가. 아이 여섯이나 낳고 죽으면 큰일 난다고. 너는 살아야 한다고. 나는 허가 맡았어요. 딸이 보내주라고 하니께. 죽으면 시어머니가 난리지. 그때부터 예수 믿었지. 죽으나 사나 나가요. 태안장로교회에 나갔어요.
동서하고 작은어머니 시어머니가 점 보러 갔다가 알긴 알았대. 그 무당이 그러더래요. 신이 붙어도 큰 천신이 붙었으니까 가만 두라고 그랬어요, 그래서 내가 그 무당이 알긴 안다고 그랬어요. 하나님이시니까 큰 천신이지요. 셋째아들도 다녔어요. 새벽기도까지 열심히 다녀요. 육촌동생도 시어머니가 데려가라고 해서 같이 다녔어요. 아들, 며느리. 손녀까지 다 잘 다녀요.
태안서 14년 다니다가 여기 와서 먼저 다니던 교회 목사님이 같이 노회하다 새동산교회 박재목 목사님을 추천해줘서 옮겼어요. 교회를 잘 만났어요. 영감은 안 다녔어요. 1년에 두 번 총동원 주일하고 온천 목욕할 때 모시고 갔어요. 죽게 되니께 학습 주고 세례 주니까 아주 잘 받고. 현관에서 예배드리니까 아멘 아멘 해요. 죽게 된께 받아들이더라고. 농사짓느라 힘드니까 술 많이 먹었어요. 일흔 일곱에 갔어요. 그래서 추도예배 드려요. 손녀가 피아노 치고 식구들이 찬송하고. 잔칫날같이 해요.
행복했던 자식농사
남편하고 금실은 좋았어요, 거친 일은 안 시켰어요. 며느리가 겸상해줘도 나는 생선 머리는 안 먹으니까 자기가 머리 먹고 나 살 떼 주고. 인정은 있어요. 말이 없지. 아이들도 내가 가르치고 시누도 내가 가르치고 초등학교 숙제도 해주고. 밤에 아이들 어렸을 때 가르치느라 힘들었어요. 영감은 그렇게 공부하고 싶었는데 아버지가 일 시키고 못 배우게 했대요. 그래서 아이들더러 일하라고는 안 해요. 공부하라고 하지. 자기는 한 됐다고. 아이들보면 자랑스러워했어요. 우리 아이들은 하나님이 다 봐주신 게 확실해요.
큰아들은 태안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공부했어요. 공부 잘해서 서울에 있는 좋은 대학 입학원서 사다 놨는데 내가 못 가게 했어요. “니 아버지 혼자 이 땅을 다 어떻게 하느냐. 고등학교만 마치고 말아라. 동상<동생>들 공부 가르치고.” 동상들 다 맡았어요. 큰아들만 대학 못 보냈어요. 지금 큰아들은 우리가 살던 집에 살고 둘째는 안산 살아요. 며느리 손녀 손녀사위 다 선생이에요. 큰 집에도 큰며느리 사위, 딸, 손주며느리가 선생이에요. 선생이 여섯이유.
막내아들도 공부 잘해서 장학생으로 한양대 들어갔어요. 어머니 아버지 여름에 일하지 말고 사람 사서 하라고 등록금 안내는 데로 들어갔어요. 되나? 일은 일대로 했지. 4학년 된께 삼성에서 스카우트해 가더라고. 삼성에서 온 세계를 다 구경시켜주고. 연구소에 5년 있으니께 군대 갔다 온 걸로 돼서 군대도 안 가네. 영감 죽고 막내아들은 가족들 데리고 며느리랑 미국으로 이민 갔어요. 공부시킨다고. 나더러도 오라는데 갑갑해서 못 가. 월요일마다 전화하는데 “요새 미국 경기가 어렵다고 하더라” 하니께
“아니유. 빚 없는 사람들은 괜찮아유. 빚 있는 사람들이나 어렵지. 저희는 빚 없시유” 그래요. 여기 아이들보다 전화 자주 해유.
막내딸은 안 낳을 줄 알았어요. 7년 만인디. 그만 낳는다고 약을 먹었거든. 약병 내놓기만 하면 구역질해서 못 먹었는디 그러다 어느 날 딸 하나 낳았어요.
큰손자는 아버지 닮아서 공부를 잘했시유. 연세대 졸업하고 삼성 들어갈 때 수원으로 이사 왔어요. 쟤 밥해주느라고. 큰 집으로 이사 왔어요. 1990년쯤에. 영감하고 막내딸 대학생일 때. 네 식구가 살았어요. 태안에서 예순네 살까지 살았어요. 시아버지 시어머니 다 돌아가시고 3년 있다 나왔어요. 풀베기 싫어서. 큰아들한테 “너 해라” 그러고 올라왔어요. 그러곤 영감 돌아가시고 집 조그맣게 줄였어요. 관리비만 많이 나가길래.
누구보다 공부 욕심이 많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행복했을 때는 아이들 학교 붙었을 때요. 둘째아들 덕수상고 붙고, 은행 다니며 야간대 다닐 때. 막내 공주사대부고 들어가고 대학 들어갔을 때. 막내딸 대학 붙었을 때. 아이들 등록금 대느라 만날 구멍 난 런닝 입고 논매러 다니며 한 푼이라도 더 부쳐주려고 할 때였어요.
■새동산교회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측 소속으로 1971년 10월 31일 경기도 수원시 조원동에서 박재목 목사가 38평 규모의 교회를 건축하고 장년 3명이 모여 교회를 시작했다. 교회가 부흥함에 따라 81년 대지 250평에 350석 규모의 교회를 다시 건축하고 지역의 대표적인 교회로 자리매김해 왔다.
32년간 목회하다 은퇴한 박 원로목사는 노회와 총회의 많은 일들을 감당했으며 아동문학가 시인으로도 활동했다. 2003년 1월 황종상 목사가 제2대 담임목사로 부임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처음에는 수원북문에 위치해 북문교회로 불리다 2005년 새동산교회로 이름이 바뀌었다. 당시에는 수원북문지역에서 큰 교회였기에 노회를 두 차례 치르기도 했지만 지금은 재개발이 진행됨에 따라 새 교회 건축을 준비하고 있다. 예배, 새벽기도, 소그룹을 3대 핵심 가치로 내세우며 날마다 아름다운 교회로 발전하고 있다.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조원동 644-11번지(031-255-1005).
수원=정리 최영경 기자·사진 곽경근 선임기자 ykcho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