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박현동]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지만
입력 2011-08-18 09:46
“누군가는 외상값을 갚아야. 외상구매 대금은 아들에게, 손자에게 청구된다”
복지가 만신창이다. 이념이 덧칠됐기 때문이다. 덧칠을 씌운 장본인은 정치권이다. 여(與)는 야(野)를, 야는 여를 향해 손가락질하지만 오십보백보다. 복지공약은 무조건 남는 장사다. 표는 자신들에게, 계산서는 국민에게 돌아간다. 세상에 공짜가 없건만 정치권이 ‘무상’을 전면에 내세운 것도 이런 연유가 아닌가 한다. 무상급식이 그러하고, 무상의료, 무상보육도 마찬가지다. 공짜로 키워주고, 공짜로 치료해 주고, 공짜로 밥 준다는데 누가 마다할 것인가.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는데. 당위(當爲)도 있다. 돈이 있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정책은 현실이다. 한정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게 정책이다. 지고지선(至高至善)의 정책을 선택하기 어려운 이유다. 쓸 곳은 많고, 쓸 돈은 부족하다. 정부 곳간은 바닥이 났다. 이미 적자다. 마이너스 통장으로 국가를 운영하고 있는 셈이다. 2013년 균형재정을 맞춘다지만 내년에 치러질 총선과 대선을 감안할 때 쉽지 않아 보인다. 무상은 사기(詐欺)다. 말이 무상이지 실상은 외상복지다. 누군가는 외상값을 갚아야 한다. 외상구매 대금 청구서는 아들에게, 손자에게 전가된다. 복지함정에 빠지기 쉬운 대중 민주주의의 한계다.
복지함정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유럽의 상황을 모르는가. 이탈리아를 예로 들어보자. 이탈리아는 유로존에서 세 번째 큰 경제규모를 가진 나라다. 하지만 올해 국가부채는 GDP 대비 128%로 추산된다. 그리스의 국가부채는 150%를 훌쩍 넘는다. 미국도 예외는 아니다. GDP 대비 국가부채는 지난해 93%에서 올해 100%를 넘을 전망이다. 이쯤 되면 빚을 내 빚을 갚아야 한다. 왜 이렇게 됐을까? 과거 정권의 무차별 복지와 현 정권의 감세정책이 주된 이유다. 입 속의 사탕은 달콤하지만 이빨을 썩게 한다는 사실을 애써 눈감은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지난해 기준 국가부채는 430조원에 달한다. GDP 대비 34% 수준이다. 여기엔 공기업 부채와 4대 연기금 부채는 빠졌다. 한나라당 이한구 의원은 우리나라 국가부채가 최대 1400조원이라고도 주장한다. 심각한 것은 국가부채 증가속도다. 조세연구원은 우리의 국가부채 증가율이 현재와 같은 속도로 유지된다면 2050년엔 GDP 대비 국가부채 규모가 115%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더욱이 100세 시대를 예고하고 있다. 당연히 재정지출이 늘어난다. 급속한 고령화에 따른 재정지출을 생각하면 아찔해진다.
복지지출은 사회적 투자다. 기업이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투자를 하듯이 정부도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해 투자를 해야 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과대한 투자, 현실을 무시한 투자를 한 기업의 결과는 뻔하다. 정부라고 예외일 순 없다. 미래를 위한 복지투자를 외면해선 안 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적 투자도 위험하다. 딜레마다.
사정이 이런데도 정치권은 무상복지로 국민을 현혹하려고 한다. 얼마 전엔 부산저축은행 예금자를 위해 현행 예금자보호법의 근간을 흔드는 특별법까지 만들려고 했다. 무책임하기 짝이 없다. 뜻은 고결하고 그들의 주장도 일견 타당하지만 동기는 불순한 경우가 많다. 행여 불난 집에서 밤 구워 먹을 궁리를 한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 오죽했으면 정치권 내에서조차 “이성을 잃었다”라는 말까지 나왔을까. 그들에게 ‘합리적 어떻게(How)’가 없다. 보편적 복지를 싫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부자도 공짜를 좋아한다. 그렇더라도 극도의 양극화가 진행되는 사회에서, 그것도 재원이 부족한 상황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혜택이 돌아가는 복지정책이 과연 올바른 선택일까?
누울 자리 보고 다리 뻗으라고 했다. 완전한 자본주의는 사실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한 것도 아니다. 사회주의적이라고 들릴지 모르나 가진 자의 희생이 일정 부분 불가피하다. 자본의 책임이 강조되는 이유다. 부의 재분배를 통한 복지정책이 현실적 선택일 수밖에 없다. 이는 자본의 윤리와 정의에 부합될 뿐더러 지속가능한 사회의 조건이다. 흥(興)하는 것은 어려워도 망(亡)하는 것은 순간이다. 영원할 것 같았던 로마 제국도 망했다.
박현동 편집국 부국장 hdpark@kmib.co.kr